“다 그림입니다, 다 책이고, 다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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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입니다, 다 책이고, 다 사람입니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15.05.1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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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신 : 개인전을 여는 우은정 형에게 … 손철주·이주은 <다, 그림이다>
▲ 연규상 (주)열린기획 대표

책·책·책/ 연규상 (주)열린기획 대표

형의 개인전이 열리는 대청호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우은정, ‘절대고독에 관한’, 5.1-5.31. 작가와 전시명, 전시일정이 적힌 로비의 안내판을 지나니 과연 1, 2층 전시실이 온통 ‘고독’으로 가득합니다. 신록이 지천인 이 좋은 계절에 궁상맞게 고독(그것도 절대고독)이라니, 짐짓 구시렁거리다 돌아온 저녁, <다, 그림이다>를 뒤적입니다.

우리 옛 그림과 동양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유려한 필치로 풀어내는 손철주, 서양 미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통찰로 감칠맛나게 글을 쓰는 이주은. 그리움, 나는 누구인가, 나이, 엄마 등 세상사 10 가지 주제의 그림들이 두 사람의 감식안 속에서 풀어지거나 엉겨붙는 정경이 자못 볼만합니다.

▲ 다, 그림이다
손철주·이주은 지음.
이봄 펴냄.

안목이 갑갑한 걸 모르고 간혹 저에게 그림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분들이 있는데(형도 그들 중 하나이지요), 그럴 때 곁눈질을 해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는 것도 바로 이 책입니다. 한 달 전쯤, 금천동 단골 순대집에 마주앉아 돼지 머리고기 한 접시 시켜 놓고 형이 그림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가령, 이런 대목입니다.

‘그리다’는 움직씨(동사)이고 ‘그립다’는 그림씨(형용사)입니다. 묘사하면 그림이 되고 갈망하면 그리움이 됩니다.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다”라는 멋 부린 말도 귀에 들리고요. 그리움은 어디서 옵니까. 아무래도 부재와 결핍이 그리움을 낳겠지요. 그리워서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은 부재와 결핍을 채우려는 몸부림일 테지요. (손철주)

이 문장에 기대어 형이 부탁한 발문의 첫 줄을 쓸 수 있었습니다. 젊어서부터 형은 온 나라를 떠돌았지요. 그러니 형의 이야기는 대개 길로 시작해 길로 끝납니다. 추정리에서 산정말로 오르는 고갯길 이야기, 회남에서 문의로 넘어가는 염티 이야기, 은운리에서 분저실로 이어지는 산길 이야기, 쌍곡에서 대야산 바라보며 걷는 달밤 제수리재 이야기…. 듣기만해도 애먼 발목이 시큰거리고 삭신이 쑤셔옵니다.

떠도는 자가 그린 어느 ‘율도국’의 풍경

형의 모습 속에서 방랑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몇 번인가 밤길을 따라 걷다가 본 형의 뒷모습에는, 마의태자나 매월당, 삿갓 시인 김병연, 오이디푸스 같은, 바랑 하나 메고 반 미치광이가 되어 방방곡곡을 떠돌았던 사람들의 환영이 설핏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무엇인가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잃거나, 명분을 잃거나, 운명에 버림받았거나. 상실은 그리움의 원천이 되고, 그리움은 다시 떠돌기의 동력이 되니, 이것이 떠도는 자의 숙명이겠지요.

손철주는 그림을 그린들 이 부재와 결핍을 채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움켜쥘 수 없는 것을 움켜쥐려는 화가의 속내를 옛 그림에서 살펴보고자 하나, 그것 또한 무망한 버릇에 그치리라고 예감하지요.

그리움을 찾아 문득 길을 떠나곤 했지만, 떠남은 그리움에 닿지 못했고 그림 또한 그리움을 다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형의 그림은, 그리움을 그림으로 채우려고 몸부림치다 든 피멍이어서 온통 짙푸릅니다.

그러니 다시 떠나는 수밖에요. 선사 이래로, 떠도는 자들은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했습니다. 기껏 행려병자나 도둑으로 치부될 뿐이었지요. 오늘날이라고 다를까요. 자본이라는 ‘갑’이 정한 ‘정글의 법칙’은 더욱 엄중합니다. 그러니 생애의 전부를 떠돌며 살아온 형은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위태로운 걸까요?

하지만 떠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겠지요. 세계의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기존의 어떠한 틀이나 개념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자유 말입니다.

형이 그린 그림 속에 다시 가만히 서봅니다. 거기엔 푸른 바람이 불고 흰 달이 떴습니다. 자유를 향한 고독한 자아가, 광막한 ‘강산무진도’의 구석에 조그맣게 서 있습니다. 발목이 시큰거리고, 삭신이 쑤신 채로, 이내 다시 길을 나설 참입니다. 그 순간 이 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것인데, 웬일인지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그림입니다. 다 책입니다. 다 삶이고, 다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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