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에는 낙옆들이 안개에 젖어 쌓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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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에는 낙옆들이 안개에 젖어 쌓이는데
  • 김영회 고문
  • 승인 2002.04.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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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한 주일 내내 안개가 꼈습니다. 이른 새벽 차를 몰고 산성에 올라 농무(濃霧) 가득한 산등성에 서 보았습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더니, 그야말로 사위(四圍)를 분간할 수가 없을 만큼 사방이 안개로 자욱했습니다. 온몸을 감싸고도는 안개, 정말 그 느낌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신비롭기 그지없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안개 속을 걷는 것은 신비 롭도다 / 숲도 돌도 모두 쓸쓸해 보이고 / 아무나무도 다른 나무를 알지 못하니 / 우리는 모두가 혼자 이로다 / 내 인생이 빛날 적에는 세상에 친구도 많았건만 / 지금 안개 내리니 아무도 볼 수 없도다 / 이 어둠을 모르는 자는 결코 지혜로운 자가 아니로다 / 조용히 만물에서 떠나게 하는 피할 수 없는 이 어둠을 / 안개 속을 걷는 것은 신비 롭도다 / 인생은 쓸쓸한 존재 / 아무도 남을 모르니 모두가 혼자이로다―
단편‘가을의 도보여행’마지막에 나오는 이 싯구는 자연의 신비와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 삶의 쓸쓸함을 아프게 그리고 있습니다.
안개라면 만인의 심금을 울린 영화‘애수’에서 트렌치코트의 로버트테일러가 옛 사랑을 못 잊고 개스등 희미한 안개 낀 런던브릿지를 서성이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명 장면이 떠오르지만 그곳이 어느 곳이든 안개 의 신비로운 현상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안개가 끼면 잠시일망정 세상의 온갖 추한 것들이 보이지가 않아 좋습니다. 하지만 귀에 들려오는 그 많은 나쁜 소식들, 그것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저 아라비아반도에서 들려오는 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소리, 또 탄져균 소동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미국인들. 어디 그것뿐입니까. 국내로 눈을 돌리면 정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정치권, 풍년이 들고도 시름에 젖어있는 농민들, 교단을 두고 시위에 나선 교사들, 경찰의 방패에 맞서 육탄전을 벌이는 교대생 들, 그날그날 의 삶에 지쳐 실의에 빠진 서민들, 어느 것 하나 쉽게 풀 수 없는 국가적 난제들입니다.
하기야 인간의 역사는 갈등과 전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인류역사 5600년에 전쟁없이 평화로웠던 때는 고작 290년에 불과 했다니 말이지요. 하긴 인간 있는 곳에 갈등이 있고 그 갈등은 역사발전의 동력이라고도 말하긴 합니다. 그러나 발전이 더디더라도 갈등이 없이 조화를 이룬다면 그게 더 좋지 않을까요. 갈등도, 전쟁도 없을수록 좋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옛 사람들은 일엽락천하지추(一葉落天下知秋)요, 오동잎 한 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을도 이제 만추(晩秋)에 접어들었습니다. 포도(鋪道)에는 간밤에 떨어져 내린 낙엽들이 안개에 젖어 아무렇게나 쌓여 있습니다.
이제 해가 나면 안개는 서서히 걷힐 것입니다. 그러면 신비로움도 걷히고 다시 온갖 세상의 추한 것들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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