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의 대학: 현실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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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의 대학: 현실과 과제”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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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생각한다>이 종 수 (연세대 교수, 미국 Yale대학 Fulbright 교환교수)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의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황송했다. 독립된 연구실을 따로 주는가 하면, 학생들을 마음껏 가르칠 수 있고, 나만의 작은 우주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5년쯤 지났을 때,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100명이 넘는 강의실에 여러 과목을 가르쳐야 하고, 학교행정에 대한 참여 요구가 과중했다. 학생들의 시험성적을 채점할 때면, 며칠씩 붙들고 씨름을 해야 했다. 하고 싶은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 역시 하늘의 별따기다. 사람들이 좋은 직업으로 흠모하는 대학교수가 이럴진대, “한국에서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평균적 삶의 질은 어떨지…”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도 했다.

 그렇게 8년 반을 가르치고 나서, 안식년을 얻게 되었다. 지난 8월 미국 Yale대학 법학부로 오게 돼, 법학과와 정치학과를 오가며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곳에 도착해서 나를 초청해준 교수를 만나러 가던 첫 날, 가장 부러운 사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에 걸린 교수이름을 세어보니, 법학부만 교수 수가 110여명에 달했다. 겸임교수까지 포함하면 200명이 넘었다. 학생과 교수의 비율이 7.3: 1이었다.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비율이다.

 도서관 역시 훌륭하다. 전공과 관련된 책과 학술지가 거의 망라되어 있고, 이용자에 대한 직원들의 서비스가 기대를 뛰어넘을 만큼 친절하다. 필자가 대학시절 그러했고 현재의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대학 도서관에서 어학공부 하는 것이 대부분인 우리와 달리, 이들은 각 전공에 대한 공부를 깊이 있게 심화시키고 있다. 세계어로 군림하고 있는 영어 덕분에 미국의 학생들은 특별한 지역연구가 아니면, 어학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조용히 도서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노라면, 여러 상념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생각건대, 우리가 이들과 경쟁하고 겨루어 이기기 위해서는 물리적 인프라도 중요하겠지만, 교육과 연구의 내용을 개선하는 일이 더 시급해 보인다. 미국 대학의 교수와 학생의 비율, 효율적인 도서관 서비스가 부럽기는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과 연구의 내용이었다. 우리의 대학교육에 있어 여러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표피적 시설과 숫자보다도 내용, 즉 알맹이라는 의미이다.

 이른바 선진국을 배우고 학습하기 위해 어학공부에나 매달리고, 전공연구를 부실화시키는 악순환을 허용하여서는 참된 발전과 추월이 어려워 보인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그대로 따라가서는 말 그대로 ‘따라갈 수 있을 뿐’이지 앞서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문제에 대해 우리식의 진단을 하고, 우리식의 처방을 내리지 않으면, 한국사회의 진정한 발전은 요원해 보인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박사학위를 한국에서 하도록 유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처럼 고급두뇌들이 대거 외국으로 빠져나가 외국의 대학에서 학위를 하게 되면, 한국에 있어서의 학문 축적은 곤란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현상을 보는 데 있어, 본질적 시각이 왜곡되고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는 이미 1960년대부터 일본의 젊은 인재들이 박사학위는 자국에서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일본 대학들의 이러한 시책이 일본의 학문적 토대를 튼튼히 하고, 자주적 학문관을 갖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박사 학위의 경우 1~2년 정도 외국 수학경험을 갖게 한 뒤, 최종적 학위논문의 집필과 제출을 국내 대학에서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고립과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고립과 국수주의 가지고는 현대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도리가 없다.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서 북한이 회복불능의 상태로 뒤쳐진 것 역시 선진문명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주체’만 주장한다고 해서 국익이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외국에 대해 철저히 알아야,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국익을 지킬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해외에 나가 학문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고, 다수는 국내에서 현실 적합성이 높은 연구를 심화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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