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사람은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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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사람은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하나
  • 충청리뷰
  • 승인 2016.02.03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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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평론가들에게 호평 받은 니나 게오르게의 <종이약국>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이연호 꿈꾸는책방 대표

▲ 종이약국
니나 게오르게 지음·김인순 옮김.
박하 펴냄.

“책은 의사인 동시에 약이기도 해요.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하죠. 손님이 안고 있는 고통에 맞는 적절한 소설을 소개하는 것, 바로 내가 책을 파는 방식입니다.”

파리, 센 강 위에 수상 서점을 열고 책을 파는 페르뒤씨의 말입니다. 페르뒤씨는 독일의 소설가 니나 게오르게의 장편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죠. 소설 <종이약국> 책의 독자라면 이 문장이 소설 전체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데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지면이 서점에 대한 페르뒤씨의 생각을 앞에 세우는 것은 요즘 핫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동네서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애정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평소 서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실천적 고민을 놓지 않고 있던 터라 페르뒤씨의 이 문장이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페르뒤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서점, <종이약국>에서 상처 받은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을 권해주는 서점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그의 처방전은 마치 병의 증상과 연유를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명의의 그것처럼 독자의 상처를 예민하게 살피고 새로운 속살을 차오르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습니다. 제 직업적 책무와 관련해서 페르뒤씨의 삶과 역할은 부러움을 넘어 부족하고 모자란 능력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소설이 여기서 끝을 맺었다면 33개국의 언어로 번역될 만큼 큰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소설은 중반부를 넘어서며 페르뒤씨의 삶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가 미처 살피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가 마침내 부끄러운 사실과 함께 드러납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하는 여인이 남기고 떠난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어두운 골방에 버려두고 지내왔습니다. 21년의 세월을 애써 모른 체하며 살아온 것이지요. 편지의 내용을 미리 판단해두고 그로부터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사실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점이었지만)에 책장 너머 어두운 골방에 가두어 두었던 ‘상처 입은 시간’의 봉인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확인한 것은 고통의 시작은 자신의 옹졸한 편견과 오해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랑의 정점에서 그녀가 그를 밀어내고 떠날 결심을 한 것은 단순한 변심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무려 21년 만에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는 센 강에 정박해두었던 ‘종이약국’의 닻을 끌어올리고 출항을 결정합니다. 고통의 시간을 되짚어가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옛사랑을 찾아 나서는 순간 그에게는 다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악령과 맞서야 자유로울 수 있다”

소설의 후반부는 상처 받은 이별의 시간과 새 살이 차오르는 새로운 시작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습니다. 상처 받은 시간과 상처에서 걸어 나온 시간의 사이의 간극, 이별의 끝과 새로운 시작 사이의 ‘문지방’ 하나를 넘는데 무려 21년이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각자의 악령이 숨어 기회를 엿보는 방이 있어요. 방문을 열고 그 악령에 맞서야만 자유로울 수 있어요.”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카트린이 페르뒤씨에게 전한 위로의 말입니다. 누구나 ‘상처 받은 시간’ 하나쯤은 가슴에 묻어두고 지낼 텐데 그 기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카트린의 이 문장을 가슴에 담아두어도 좋겠습니다.

어느덧 소설은 옛사랑이 잠들어 있는 땅으로 들어섭니다. 페르뒤씨와 동행한 조당과 쿠에노는 그 여정에서 상처 받은 삶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세상 모든 이들이 마침내 만나게 될 화해의 시간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프로방스에서 페르뒤씨는 서점의 직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어떤 경우엔 사람에게 맞는 책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 맞는 사람을 골라 그 사람에게 그 책을 권하기도 합니다. 책의 연인으로서, 친구로서, 제자로서, 환자로서 가장 적당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책을 권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서점의 여주인이 묻습니다.

“어떤 책이 당신을 그 모든 악에서 구해주죠?” 페르뒤씨가 답합니다.

“책들이 많은 걸 할 수 있지만 모든 걸 할 수는 없어요. 중요한 일들은 직접 살아봐야 해요. 책으로 읽지 말고.”

상처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이의 진지한 고민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페르뒤씨가 다시 책으로 돌아와 독자에게 내놓은 새로운 처방전입니다. 꿈꾸는책방도 그렇게 진지한 고민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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