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목발을 고집하시는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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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목발을 고집하시는 분들께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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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생각한다>김 인 국 신부(천주교 청주교구 민족화해위원장 )

 국가보안법 폐지 건으로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고 서로 간에 우기는 마음들이 생겨 오랜만에 풍년이라는 가을풍경도 마냥 편하지 않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제 본분사도 힘겨운 판국이라 저런 논쟁에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도 바쁜데 엉뚱한 부스럼 말고 경제나 살리자는 소리가 먼저 불쑥 나오게 되는 형편입니다. 민생고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니 그런 말씀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뜻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결사항전을 선언하신 분들의 소식을 듣습니다. “이러다가 나라 망한다!”하시는 그 분들의 안타까움과 분기탱천하시는 진심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보안법에 사활을 걸고 과거 청산이라는 당연지사를 향해 차마 듣기조차 무서운 소리를 마구 쏟아내는 것을 들으면서 그 분들의 부끄러운 지난 행적이 새삼 떠올랐고, 그 격렬한 저항에는 어떤 어둔 생각이 깃들어 있지 않나 싶어 걱정이 앞섭니다.

 친일 진상규명이니 보안법 폐지니 사실은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닌데 자꾸 어렵게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허물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무겁고 아픈 것 다 짊어지고 가자면 괴롭고 힘드니 기회가 생길 때마다 털어 버리는 게 사람의 지혜입니다. ‘과거’를 버려서 ‘오늘과 내일’을 살리자는 취지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참 알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2000년 3월 12일 지난 2백년간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전 세계를 향해 용서를 청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백이야 말로 예수의 정신을 참되게 실천한 용기 있는 행동이라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공적인 참회를 통해서 교회는 지난날의 잘못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과거의 기억 또한 깨끗이 정화되었습니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교황의 가르침은 참으로 옳았습니다. 과거사를 꼭 붙들고 놓지 못하시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덜된 놈일수록 덜 떨어지더라!” 땅콩을 거두는데 덜 익은 녀석일수록 줄기를 붙들고 놓지 않더라는 어느 농부가 가르쳐 준 지혜입니다.

 다들 아시는 대로 가톨릭교회는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유작이 1500년 이상 신봉해온 지구 중심의 우주체계를 부정했을 때 새로운 사조가 진리를 변질시키는 줄 알고 엄청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오늘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새로운 진리가 수용되고 낡은 지식이 쇠퇴하는 과정이란 대개 그렇습니다.

 구한말 단발령이라는 폭탄이 떨어졌을 때 “두가단(頭可斷)이언정 발불가단(髮不可斷)”하면서 울고불고 한 일도 오늘 돌아보면 얼마나 싱겁습니까. 정작 국모가 시해되는 치욕 앞에는 한 마디도 못하다가 고작 터럭의 문제로 발끈했으니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는 그 결의도 당시로서야 가상하였겠으나 오늘 다시 보면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38년이나 앓던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요한 5,8)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 겨레도 얼른 일어나 당당하게 걸어가야 할 텐데 여전히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약해 보입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목발타령이라니 참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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