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詩면서 철학이고 그림이자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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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詩면서 철학이고 그림이자 노래
  • 충청리뷰
  • 승인 2016.09.2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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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김훈의 <자전거여행>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이은자 前 공무원
 

▲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문학동네 펴냄.

여행을 떠나기 전 새로운 풍경, 낯선 사람, 새 음식의 상상은 얼마나 우리를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가. 문학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경전처럼 꼭 읽어야 하고, 읽고 나면 두고두고 다시 읽게 되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집어 들게 되는 책. 김훈의 <자전거여행>은 바로 그러한 책이다.

그의 자전거는 우리나라 국토의 동맥과 실핏줄을 온전히 온몸의 동력인 원형의 다리와 발로 저어간다. 숱한 산맥의 재를 넘고 강물과 해안선을 지나며 들판을 달릴 때, 길은 그의 가슴에 흘러들고 풍경은 그림이 된다. 그가 지나간 궤적마다 산하, 역사, 풍경, 사람, 음식, 마을의 멋과 맛이 그의 유려한 필치로 살아난다.

자전거 여행은 오르막을 오를 땐 힘이 들어 숨이 턱에 닿고, 내리막을 내달린 때 저절로 힘이 남아 가속도가 붙는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기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해서 크게 좋은 일의 기쁨과 크게 궂은 슬픔의 양도 결국은 다 비기는 정도이다.

그는 이순신을 존경했다. 그의 문체는 병고에 시달리고, 근심걱정이 많은 정한의 인간이었음에도 일체의 내면을 배제한 채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줬던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닮아 있다. 간명하면서도 아름답고, 깊고 진한 문장에서는 깊은 감동이 절로 우러난다. 또한 매화가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든지, 목련이 등불을 켜듯이 일어나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린다 등의 표현은 그의 펜 끝에서 모국어가 영롱하게 빛남을 보여준다.

등대는 세상을 소통과 이동과 지속이 가능한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저 자신을 이 세계의 가장 외지고 후미진 해안 고지나 섬에 위치시킨다. 3차원의 공간속에서 나는 너의 존재와 위치를 상대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다. 나에게 위치를 가리켜주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이며 이 세계라고,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내게 그의 글은 거대한 이정표의 기둥으로 우뚝 선다.

우리땅과 우리말을 살려내는 김훈

그는 <칼의 노래>를 쓸 때 여덟 개의 이를 뽑아 휴지통에 넣으며 자신을 소진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서는 어휘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골라 쓰고, 가려 쓰며 진력을 다한 고심의 흔적과 결기가 느껴진다. 소설 속에는 문학의 모든 장르가 녹아 있다, 소설가가 쓴 그의 <자전거 여행>은 단순한 기행문이나 수필이 아니다. 시이자 철학이고 그림이자 노래이며, 글이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학의 정수이다.

그는 이 강산의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에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강고한 세월의 틈새를 비집으며 언 땅을 뚫고 올라온 겨우 존재하는 여리고 애달픈 쑥국에 대하여, 맛의 근원이자 다른 모든 맛을 살아나게 하는 소금에 대하여, 모든 맛의 맨 밑바닥. 안쓰러운 재첩국에 대하여, 끊임없이 흙을 뱉어내며 새 집을 지어야 하는 기구한 무주택의 운명 갯지렁이에 대하여, 껍데기에 삶의 고달픔과 기쁨을 새겨 넣는 조개 등 먹이사슬 맨 밑바닥의 비애와 평화를 이야기한다. 그의 자전거는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우리 발길이 쉬 닿지 않는 곳,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곳,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지나가며 살려낸다.

그의 글은 단숨에 읽어내기에 너무 아깝다. 머리맡에 놓아두고, 마법의 주문처럼 신이하고 영험하게 두고두고 새기며 암송하고 싶을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이 경전처럼 와 닿는다. 글이 좋아서 천천히 읽어야 하는데 글이 좋아서 눈이 빨리 앞질러 가게 됨은 어쩔 수 없다.

긴 여행을 통하여 옥구 염전의 미세한 소금알갱이부터 태백산맥의 준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와 만나고, 정 들고, 헤어지며 긴 여행 끝에 작가는 마침내 병든 애마, 늙은 연인, 망가진 풍륜과 작별하고 새 풍륜을 마련한다.

이 가을, 그는 페달을 힘껏 밟고 어디론가 또 떠나기 위해 바람을 가를 것이다. 가을엔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모든 열매가 떨어진 가을은 황량해서, 쓸쓸해서, 더욱 더 낯선 곳으로 떠나 뼈저리게 외로워져서 돌아오는 여행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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