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자. 무심한 잉여와 절절한 결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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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자. 무심한 잉여와 절절한 결핍을
  • 충청리뷰
  • 승인 2017.02.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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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직언직썰/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결혼 25주년을 맞아 아내와 둘이 제주 2박3일 여행을 다녀왔다. 마침 잘 아는 형님 부부가 중문 가까운 중산간에 이탈리아 식당이 딸린 펜션을 하신다기에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하나밖에 없다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 <우니꼬>란 이름답게 식당은 오직 한 팀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고 벽난로가 있어 운치를 더했다. 모처럼 와인과 이탈리아 요리를 즐기면서 소녀처럼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다행이다 싶었다.

형님네는 재혼 부부다. 사별과 이혼의 아픔을 겪은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자리의 사회를 내가 보았고, 그래서인지 두 분의 행복을 늘 빌었다. 간간이 뵙고 SNS로 소식 접해왔지만, 이렇게 알콩달콩 사시는 보금자리를 와서 보니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눈 이야기들 가운데 중매 이야기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형수님 주변에 참 좋은 여성들이 많은데 짝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다며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얘기였다. 재혼해서 잘 사는 두 분을 보면서 아마도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했을 것이고, 늦게라도 좋은 배필 만나 잘 살고 싶은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좋은 사람이 좋은 짝을 만나는 건 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기 머리 스스로 깎지 못한다는 말처럼 누군가 이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중매쟁이’가 필요하다. 형수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혼과 사별로 홀로 사는 친구와 선후배들 얼굴이 떠올랐다. 기회를 잡아 소개해 드리겠다고 약속드렸다.

중매는 혼인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 삶 곳곳에 중매가 필요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축구도 그렇다. 공격수와 수비수를 이어주고 필요한 곳에 적시에 볼을 배급해주는 링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중매와 링커의 역할은 마을과 도시의 살림살이에도 매우 중요하다.

인구가 늘면 집을 짓고 필요한 기반시설을 빨리빨리 공급하는 것이 과거의 도시계획이었다면, 지금처럼 인구가 줄어가는 시대의 도시계획은 전혀 달라진 숙제를 풀어야 한다. 수요에 맞게 공급하는 게 아니라 잉여와 결핍을 이어주는 일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 삶터에는 잉여와 결핍이 공존하고 있다. 한 평의 공간이 없어 절절매는 사람도 있지만, 빈집과 빈 사무실처럼 쓰이지 않고 방치된 공간도 많다. 사람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농어촌과 작은 기업이 있는가 하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가 타는 청년들이 늘어간다. 여기는 모자라서 문제인데 저기는 남아서 문제다. 절절한 결핍과 무심한 잉여가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각각 따로 노는 형국이다. 선남선녀가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늙어가는 것을 보듯 애달픈 일이다.

그러하니, 마을과 도시에도 중매쟁이가 나서야 한다. 오지랖 넓게 이쪽저쪽을 두루 아는 ‘오지라퍼’들이 필요하다. 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공간과 사람들과 물건들의 ‘잉여’를 파악하고, 그것을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결핍’과 이어줘야 한다.

도쿄 세타가야 구는 도심의 빈집을 기증 받아 ‘지역공생의 집’으로 되살린 뒤 필요한 주민들에게 내어주고 있다. 서울시도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통해 결핍과 잉여를 연결해주는 다채로운 사업을 벌이고 있다. 박원순 시장 취임 후 지난 5년 동안 15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5000개 이상의 모임을 만들며 서로의 결핍과 잉여를 연결하고 있고, 그 수는 더욱 늘 것이다.

인구감소 시대다. 자꾸 부시고 새로 지을 게 아니다. 지금 이곳의 결핍을 핑계로 새로운 개발을 부추기지 말자. 서울과 수도권 인구의 절반쯤이 인구소멸의 위기를 겪는 지방과 농어촌과 비어가는 구도심에 내려온다면 대한민국의 국토문제, 지역문제, 도시문제의 태반이 해결될 것이다. 부시고 짓지 말자. 잇자. 무심한 잉여와 절절한 결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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