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충주의치욕스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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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충주의치욕스런 역사
  • 윤호노 기자
  • 승인 2017.03.2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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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식 충북도장관, 민족자결 폄훼하고 “경거망동 말라” 협박
김희찬 씨 매일신보에서 확인, 시민들 만세운동 강행 기록도

3·1, 4·19, 5·18, 6·10…날짜를 보면 어떤 날인지 알수 있지만 현재는 일반인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고 있다. 3·1만세운동도 그렇다. 단순히 기념식을 하고 하루 쉬는 공휴일 정도로 여기고 있다. 소녀상 건립과 위안부 문제 등 아직 해결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며 98년 전 충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명해본다.

충북도장관 충주 연설 재현 모습.

1919년 3월,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당시 충북도장관(현 충북도지사)이 만세운동을 막으려고 충주를 방문해 긴급 연설을 했다. 같은 해 3월 11일 충주 장날을 기해 계획했던 만세운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장헌식 충북도장관은 3월 14~15일 이틀 간 전격적으로 충주 교현초교 강당에서 만세운동을 경고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독립선언문의 민족자결주의의 허구성, 파리강화회의 결정의 무관성, 만세운동에 경거망동하면 국법으로 엄중히 처벌할 것 등을 역설하며 충주 주민을 억압했다. 장 장관은 “단지 용어의 형식에 얽매여 그 본의를 살피지 않고 경거망동한다면 크게는 화가 전 세계에 미칠 것이고 작게는 개인과 가정에 불행을 가져오는 것임을 두루 살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어 “조선의 각 지방에서 이 민족자결의 참뜻을 오해하며 혹은 고의로 곡해해 뭇 사람들을 홀려 소요를 일으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가 많다”고 언급하며 만세운동의 본질을 왜곡·폄훼했다. 그는 “다행히도 오늘까지 우리 충북 도내에선 이러한 무리가 없다. 실로 우리 충북 민중을 위해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란 감언이설로 만세운동 확산 차단에 주력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해 3월 19일 괴산에서 벽초 홍명희가 주도한 괴산읍 내 만세운동이 충북에서 처음으로 일어나고 도내 전역으로 확산된다. 충주지역에서는 앞서 11일 달천리 천도교인들이 충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홍종호·김흥배가 체포된 기록(한민족독립운동사 3권347페이지)도 있다. 또 4월 1일 신니면 용원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여 은옥경·손승억 등 9명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억압 이겨낸 만세운동…행사 재연

당시 상황은 1919년 3월 20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됐다. 이때 보도된 것을 비영리단체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원회’ 김희찬 간사가 발굴해 재연했다. 충주3·1운동기념사업회와 충주3·1운동100주년행사준비위원회가 최근 98주년 3·1절을 맞아 교현초등학교 강당에서 충주 3·1운동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번 행사에서는 98년 전 들불처럼 일어난 3·1 만세운동 확산을 막고자 당시 충북도장관이 급히 충주를 찾아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 학생과 교사, 기관·단체장, 면장과 구장, 지역 유지에게 한 연설이 재연됐다.

연극인 신혜철(충주예총 감사) 씨가 장헌식 당시 충북도장관의 역할을 맡았다. 행사는 1부 기념식에 이어 2부 상황극 재연과 김충열 교현초 교장의 개교 121주년 기념 연설, 어경선 전 충주예성문화연구회장의 100주년 행사 추진위원회 구성 제안 등으로 진행됐다.

행사가 열린 교현초는 올해 개교 121주년을 맞는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 3·1운동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장소로 알려졌다. 1919년에 충주 읍내장터에서의 3·1운동이 계획될 때 교현초의 전신인 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사전 정보누설로 만세운동이 열리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 학교 강당에서 일제가 주최하는 공식행사들이 연이어 개최됐다.이런 의미에서 기념사업회는 교현초 강당을 3·1운동 기념식 장소로 선정했다.

3.1운동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자체 고증작업을 통해 충주에서도 왕성한 만세운동이 있었던 사실을 지난해 공개한 바 있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고인들의 후손을 만나 사진이나 채록을 받는 과정을 통해 5명의 독립운동가도 발굴했다.

그 중 한 명이 충주 공립보통학교 출신인 류자명(柳子明·1894~1985) 선생이다. 류 선생은 충주 읍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가 사전 누설로 피신해 후에 의열단 핵심 지도자로 활약하며 남북한과 중국에서 모두 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다. 행사장에는 선생의 손자인 류인탁(75) 씨도 함께했다.

한편 충주 3·1운동기념사업회는 올해 안으로 충주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해 운영위를 새롭게 구성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에는 3·1운동 기념행사를 범시민적 축제로 열 계획이다.

/ 윤호노 기자 hono77@hanmail.net

 

“우연히 매일신보 기사보고 억압·탄압 확인”

인터뷰/ 아이들의 하늘주비위원회 김희찬 간사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충주를 방문한 당시 장헌식 충북도장관(현 충북지사)의 연설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 김희찬 아이들의 하늘주비위원회 간사다. 김 간사를 만나 발견배경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장헌식 당시 충북도장관의 연설을 찾게 된 배경은?

“우연이었다. 충주라는 검색어로 자료를 정리하던 중 1919년 3월 20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게 됐다. 그동안 충주를 구속하는 것이 있었다. 만세운동을 왜 제대로 못했나 하는 자괴감이었다. 변명 또는 이유도 모르고 그 긴 세월을 지내왔는데 당시 억압·탄압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3·1기념행사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는데 이유는?

“그동안의 기념행사를 보면 상투적인 행사에 그쳤다고 본다. 행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고, 전체 레퍼토리에 내용이 들어가니 분위기가 살아났다. 이 때의 상황은 연극으로 만들 수 있는 소재도 된다. 1919년 당시 용어가 많이 다르고 한자 문법도 현재와 달랐지만 당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2019년이 되면 3·1운동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된다. 우선 기회가 되면 논문형태로 정리를 하고 싶다. 또 나 혼자 힘으로는 힘들 것 같고 학술단체들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 세미나를 열었으면 한다. 아울러 거기 머무르지 않고 3·1운동을 우리 것을 보여주는 축제로 승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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