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젊은이들 모두 성안길에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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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젊은이들 모두 성안길에서 만나
  • 충청리뷰
  • 승인 2017.08.2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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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신일다방·심지다방 등 생각나…심지다방에서는 시화전 열어
청주약국 서편 거리 넓은 이유는 청남문 이중성곽 ‘옹성’ 있었기 때문

청주길 사용설명서(6)성안길2
윤석위 시인, 청주흥덕문화의집 관장

 
사람들은 저마다 별난 데가 있기 마련인데 대개 그도 저도 별난 데가 없는 이를 보통사람이라고 부른다. 충북환경련 대표로 있는 내 동무 연 모씨는 젊어서부터 산소도 부족하고 험하기 짝이 없는 외국 고산을, 그것도 원정대장으로 다녀온 특이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요즘도 부지런히 뭔가를 만들어 이웃에게 거저 나눠준다. 전에 배워 둔 문화재청 염색기술을 무료로 이십년 넘게 가르치기도 한단다. 별종이다. 나는 별종이 많은 도시가 좋다.

제 앞가림도 부족해 뵈는 사람이 저 좋아 봉수대를 찾아다니거나 양조장기행이라며 전국 술도가를 찾아다니던 나 같은 불량감자도 있고. 특별히 바람직한 예로 일제 강점기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처럼 수만금 온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던지는 비상식류(非常識類)의 우량한(?) 선민도 간혹 있기는 하다.

청주문화사랑모임은 1994년 남문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웠다.

그래도 보통사람의 꿈은 보통사람으로 세상을 살기는 싫다는 게 꿈이지 않는가? 부족하긴 하지만 나도 내가 대표로 있던 문화사랑모임이 성안길이라는 좋은 이름을 살려 청주에 남겼으니 슬그머니 자랑스러울 때도 있다는 변명이다.

청주는 젊은이들이 딱히 놀만한 곳이 없었다. 한여름에 갈 곳은 무심천 다리 밑이나 명암지 윗쪽에 있던 풀장이 고작이고 그 상류의 약수터와 상당산성이 시내 초등학교 소풍장소로 거의 유일했다. 그러던 시절이 지나면서 국립청주박물관과 동물원이 생긴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우암산이나 상당산성이 그나마 정비되고 편의시설도 들어선 때는 또 엊그제다.

그 시절 우리들은 학교가 끝나는대로 성안길 입구로 모여 청주약국까지 하릴없이 배회하는 게 노는 전부였다. 70년대가 지나도록 싸우며 건설하자는 국정지표 때문이었는지 어른들이 갈 만한 곳은 오직 집과 다방뿐이었다. 청주도 성안길 산업은행 주위에 유명한 다방이 여럿 문을 열고 있었다.
 

청주약국, 충북에서 땅값 가장 비싸

신일다방은 산업은행 골목 끝에 있었고, 심지다방은 흥업백화점 골목에 있던 오래된 다방이다. 고등학생들의 시화전은 중앙공원 문화원전시실에서 열고 대학생들의 전시회는 심지다방이 유명했다. 나도 이십대 초 시화전이란 걸 심지다방에서 연 적이 있었다. 젊음은 얼마나 치기만만한가? 세븐다방, 낭랑다방…이런 촌스런 다방이름을 안다는 건 늙었다는 증거다.

청주약국은 성안길의 끝이지만 2000년대가 지나도록 충북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상업지중의 요지였다. 지금은 그 위치가 북쪽으로 이동해서 산업은행청주지점까지 옮겨졌다고 한다. 청주성 남문이 있던 이곳은 60년대까지 버스터미널, 방송국, 은행 등이 몰려있던 곳이다. 그러니 자연히 땅값도 비쌌고 거리는 번화했으며 가게들도 화려했다. 꿈은 새벽이면 깨는 법이고 그 번화했던 영화는 버스길을 따라 옮겨간다.

과거 청주는 젊은이들이 딱히 놀만한 곳이 없어 성안길을 배회하는 게 전부였다. 현재 성안길의 모습.

청주성 남문은 ‘청남문’이고 유일하게 문루사진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곳이다. 청주약국 서편 거리가 넓게 도로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곳에 청남문의 옹성(甕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옹성이란 적들이 문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겹으로 쌓은 이중 성곽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도 이곳을 공격하기 어려워 서문을 집중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문 밖은 문외리(門外里)라고 불렀다. 몇 년전 청주성탈환축제 총감독이란 직책을 맡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책을 찾아 배운 지식이다. 그 문외리가 지금의 남주동이고 육거리시장이다.

한식 건축물규격은 쉽게 전당합각루(殿當閤閣樓)라고 외웠다. 우리건축에는 품(品)과 격(格)이 있어서 전(殿)은 왕의 집무실이나 처소에 쓰고 아래로 차례차례 낮추어 썼다. 루(樓)는 2층 건축물을 말한다. 중앙공원에 다시 세운 망선루도 2층 누각이다. 그러고 보니 청주 성안거리 그 옛 관아를 중심으로 하던 청주의 중심 한옥은 망선루와 청주동헌과 병마절도사영문만 남아있는 셈이다. 아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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