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나이 든, 빛바랜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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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나이 든, 빛바랜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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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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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홍 동화집 <못나도 울 엄마>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나경 전 꿈꾸는책방 점장

못나도 울 엄마 이주홍 지음 창작과비평사 펴냄

이사를 앞두고 먼저 한 일은 책장을 비우는 것이었다. 어쩌다 좁은 공간을 꽉 채운 책은 일부를 친구에게 보냈어도 이사 때마다 가장 무거운 짐이었다. 그럼에도 내려놓지 못한 책들. 이번에는 기필코 책장을 비우리라 마음먹고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골라냈다. 흥미가 사라진 책, 누렇게 변해 읽기 힘든 책, 개정판이 나와 있어 언제든 다시 살 수 있는 책을 추려 과감하게 내놨다.

물론 누렇게 변했지만 차마 내놓지 못한 책도 있다. ‘창비아동문고’ 이름을 달고 나온 이주홍 선생의 동화집 <못나도 울 엄마>도 그 중 한 권이다. 70년대 말에 나온 책으로 나이로 따지자면 내 또래다. 분명 아주 어렸을 때 읽었을 텐데도 어찌 된 일인지 제목만 봐도 내용이 눈에 선하다. 물론 표제작 말고 함께 실려 있는 나머지 열 한 편은 희미하지만 말이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명희는 종종 부모한테서 “너는 서면 철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애”라는 말을 듣곤 했다. 자기를 놀리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머니한테 사실이냐고 묻지만 어머니는 웃기만할 뿐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 밑에서 떡을 파는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명희를 보자마자 덥석 손을 잡으며 “내가 네 어미”라고 말하지만 명희는 지저분하고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무섭기만 하다.

그러다 갑자기 아프다고 쓰러지는 할머니를 일으켜 주고 집까지 모셔가 물을 떠다 먹여 주며 어느새 할머니를 엄마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고는 “한쪽 눈이 없으면 어때요! 한쪽 팔이 곰배팔이면 어때요! 난 엄마하고 같이 있을 테야”라고 외친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데도 엄마가 나을 때까지 곁에 있겠다며 버티던 명희. 하지만 이는 ‘시원하고도 어딘가 섭섭한’ 꿈이었다.

측은지심을 키워 준 동화

마치 한 편의 콩트같기도 한 이 글은 사실 큰 감동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느낌이 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랫동안 남아 있다. 아마도 어렸을 때 경험 때문이지 않을까? 명희처럼 나도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한테서 “너희 엄마는 저어기 다리 밑에 있다”라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놀리는 것을 알았기에 “아니에요”라고 대꾸를 하다가도 어느 날은 “아니라고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러면 아저씨는 한 술 더 떠서 “아이고, 다리 밑에 있는 염소랑 똑 닮았네” 라며 놀려댔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그 말이 서운하고 화가 나는 날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정말로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엄마 눈은 짙게 쌍꺼풀이 있는데 내 눈은 외꺼풀이었고 엄마 코는 작아도 오똑하니 예뻤는데 내 것은 납작했다. 살결이 하얀 부모님과 달리 나는 속살까지 까맸으니 구멍가게 아저씨 놀림에 정말인가 싶은 것도 당연했다.

책에는 아동문학 볼모지 시절답게 표지를 제외하고 그림이 전혀 없다. 그런데 나는 여태 이 책 속에 삽화가 있다고 생각했다. 명희가 엄마와 대거리를 하는 장면, 복자 언니를 따라 집을 나서서 굴다리로 걸어가는 길이며 엄마일지도 모르는 떡장수 할머니와 함께 간 할머니의 허름한 판잣집 그림이 머릿속에 선명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어린 나는 동화를 읽고 나서 역시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건 거짓말이야, 라고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컴컴한 굴다리 밑에서 불편한 몸으로 떡을 팔고 개집만한 판잣집에서 끙끙 앓고 있을 할머니가 생각 나 오래도록 마음 아팠던 기억이 있다. 꿈에서 깬 명희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꿈이 시원하면서도 섭섭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의 측은지심이 이때 조금 더 생겨났을 것이다. 이 동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책 해설에서 이오덕 선생은 〈못나도 울 엄마〉를 “가난한 부모형제와 고향과 조국을 멸시하는” 시대에 “가난한 제 것을 귀히 여기는 자주정신을 갖게 하려고 쓴 작품”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거창하게까지 해석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에게 측은지심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

정리할 것들을 잔뜩 남겨두고도 오랜만에 손에 든 빛바랜 동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림이 없어도, 누렇게 변했어도, 어린 날 기억을 떠올려 주는 책 한 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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