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 이제 제대로 복원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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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 이제 제대로 복원될까
  • 윤호노 기자
  • 승인 2017.10.1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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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역사바로세우기 동참…역사 속에 묻힌 아나키스트 조명

문재인 대통령이 일제 치하 독립운동 및 1970년대 반독재투쟁 등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본격화한 가운데 충주시도 독립운동가 생가복원을 추진하는 등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인물 재조명에 나서고 있다. 충주시는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우근(友槿) 류자명(1894~1985) 선생의 복원을 추진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본격화한 가운데 충주시도 독립운동가 생가복원을 추진하는 등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인물 재조명에 나서고 있다. 사진은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류자명 선생과 생가터.

시는 대소원면 영평리 404-4 일원에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기로 하고 현재 설계를 하고 있다. 이 달까지 설계를 마치고 예산을 확보하는 대로 생가 복원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생가 설계는 2010년 한 마을 주민이 개략적으로 그린 62㎡ 규모 초가 형태의 건물 구조를 토대로 한다. 생가는 안방·윗방·건넛방 등 방 3개와 부엌 2개, 곳간 1개 등이 배치된 ‘ㄱ’자 형태다.
생가는 본래 초가집이었지만 시는 기와집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유족 등 관계자 회의에서 다른 지역의 예를 들어 관리에 어려움이 많은 초가집 대신 기와집으로 복원하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유족이 소유한 770㎡ 가량의 생가 터는 현재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는 생가를 복원하면 주변에 주차장과 간이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갖출 계획이다.

‘암살’ 의열단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영화 '암살'은 의열단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이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가 친일파와 일본군 사령관 암살 작전을 모의하는데서 시작한다. 김원봉 단장을 주축으로 1919년 조직된 항일 무장 독립단체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 폭파 등 직접적이고 과격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김원봉 단장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한 뒤 참모장으로서 의열단을 이끌었던 사람이 류자명 선생이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신채호 선생,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김좌진 장군 등과는 달리 류자명 선생은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1894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충주간이농업학교(현 충주 국원고) 교사로 재직하던 류자명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만세운동을 계획했지만 일본 경찰의 밀정에 탐지돼 서울로 피신했다가 이후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1919년 6월 청년외교단의 후원금과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임무와 함께 임시의정원으로 선임됐으며 여운형의 소개로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22년 4월 베이징에서 신채호, 이회영 등과 교유하다가 톈진에서 의열단의 김원봉과 인연을 맺게 돼 그해 6월 항일투쟁의 의지를 품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류자명은 신채호, 이회영, 김창숙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를 내세우며 아나키스트 활동을 이어갔다. 류자명은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 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논리로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했다.

그는 의열단원의 진보적인 사고형태를 아나키즘적인 것으로 이끌었고, 이는 신채호가 작성해 1923년 선언한 조선혁명선언의 독립운동이념을 통해 잘 나와 있다.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으며 김원봉 단장을 비롯한 대다수 단원이 폭력 노선을 포기할 때에도 류자명은 홀로 의열단을 지키며 의열투쟁을 이어갔다.

이후 그는 1927년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해 중국, 인도 등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국제연대활동을 펴는 한편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 유기석, 정해리, 안공근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한 뒤 1933년 육삼정(六三亭) 의거를 배후에서 지휘하며 일본공사를 폭발시키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류자명은 중국인과 다시 결혼한 이후 1938년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이어왔으며, 1941년 충칭을 무대로 전개된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1942년 임시정부가 중국 관내 좌우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 통합의회가 구성될 때 임시의정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자주노선 걷다 1985년 별세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았지만 조국이 아닌 중국에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해야 했으며, 한국전쟁 등으로 귀국시기를 놓치며 중국에서 원예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중국과 충주 등에 살고 있다. 그동안 활동 내용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활동이 점차 알려져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1978년 3급 국기훈장을 수여해 남북 두 체제에서 동시에 인정받은 독립운동가가 됐다.

류자명은 1985년 4월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2002년 3월 봉환해 국립대전현충원에 한국인, 중국인 부인과 합장돼 있다. 그의 저서로는 회고록 ‘나의 회억(1984)’이 있으며, 전기로 ‘행동하는 지식인 류자명 평전(원제 불멸의 지사 류자명 평전·류연산 지음, 2004년)이 있다.

류자명 선생은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 중 가장 먼저 아나키즘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자신의 신념으로 정착한 인물로 여겨진다. 또 좌우익 이념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일본이나 중국 동지들과도 친교가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자주적 행보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우익세력이나 소련의 지시를 따랐던 조선 공산당과 달리 류자명은 어느 나라도 사대하지 않고 자주노선을 걸었다는 것.

지역의 한 향토사학자는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자주적 노선에 있다”면서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당하게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 자주노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충주시는 한때 선생의 이런 역사적인 활동을 기려 그의 생가터 복원과 문화원 건립 등의 사업을 추진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단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들어 그의 평가와 사업 추진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충주지역 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는 “취임 초반부터 적폐청산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이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다”면서 “이번 기회에 류자명 선생에 대한 평가와 복원사업도 제대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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