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먹는 원로작가 강준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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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먹는 원로작가 강준희 선생
  • 윤호노 기자
  • 승인 2017.11.1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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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눈 실명 딛고 문학상 수상 작품집 펴내
초등학교 학력 전부…독학으로 이룬 작품세계

가을이 깊어지면 누구나 작가가 된다. 설령 작가는 아니더라도 늦가을 정취를 느끼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된다. 11월 어느 늦가을 오후 우연히 충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강준희 선생을 만났다.
그는 산수(傘壽)를 넘긴 83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최근에는 ‘꿈’이란 제목의 인생수첩을 발간했다. 이 작품까지 소설과 수필 등 40여 편을 저술했다. 충청지역 소설가로는 최초로 문학전집을 출간했고, 현재 문학전집은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 소장도서 목록에 올라가 있다.

강준희 선생

문학전집의 겉표지에는 ‘작가 강준희는 한국판 막심고리끼, 현대판 최학송이다’라는 글귀가 들어 있다. 선생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보면 왜 이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알 수 있다. ‘아 어머니’, ‘미구꾼’, ‘하늘이여 하늘이여’ 등 주로 서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선생이 어렸을 때 가세가 기운 후 노동판 품팔이, 엿장수, 연탄배달부, 인분수거부, 풀빵장수 등 모진 삶의 풍파를 겪은 선생 본인의 내공과 철학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그는 1935년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서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가세가 기울면서 보통학교(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인생수첩 ‘꿈’

그러면서도 문학 열정을 버리지 못해 습작활동을 계속했다. 당시만 해도 책이 없어 읽을거리라면 무엇이든 찾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마침내 1966년 신동아에 ‘나는 엿장수외다’가 당선돼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하 오랜 이 아픔을’이 당선된다. 또 1974년에는 오영수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하느님 전상서’가 실리면서 문인의 길을 걷게 됐다. 2008년 11월에는 국학자료원이 그의 문학 자취를 10권 전집으로 묶어냈다. 그의 작품은 충주, 제천지역 토속어의 감칠맛 나는 언어구사로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대학에서 언어연구 교재로 활용될 정도다.

“문사는 탐욕 없고 청렴결백해야”

또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한학과 영어, 일본어, 철학까지 공부해 박학다식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대입학원 강사와 언론사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1년에 글 한편 쓰지 않는 문인이 허다하다. 그게 어디 문인이냐”고 반문했다. 특히 선생은 문인이라는 말 대신에 문사라는 말을 즐겨 쓴다. 문사란 글 쓰는 이로 선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사란 속기가 없고 탐욕이 없어 청렴결백하고 지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고고하고 초연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가난에 찌들어 있을 때 중앙 문단에서 주는 문학상을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당시 문우들이 모두 말렸지만 끝내 상을 받지 않았다.

‘창작은 배고픔에서 시작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끝없는 절망과 좌절로 빠질 수도 있는 것 또한 창작활동이다. 선생은 온갖 삶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 변절하거나 훼절하지 않은 채 오직 지조, 강직, 개결, 청빈으로 올곧은 삶을 일관되게 살아 온 이 땅의 선비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강준희 선생이 쓴 책들

이런 선생의 신조를 표현하듯 좌우명 또한 ‘깨끗한 이름’, 청명(淸名)이다. 선생은 (사)한국선비정신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고, ‘선비의 나라’, ‘지조여 절개여’, ‘선비를 찾아서’ 등 지조와 절개, 선비정신을 주제로 한 작품활동으로 명성이 높다. 그는 이런 신념과 작품 이야기, 삶의 다양한 이야기를 ‘지역 작가와의 만남’ 시간을 통해 일반 시민에게 들려준다.

강 선생은 “소위 문사라면 아무리 높은 사람이 불러도 자신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며 “군사정부 시절 문사라는 사람들, 대통령이 부르면 조르르 가서 머리나 조아리고 기분이나 맞춰 주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서정주 시인이나 김춘수 시인 같은 이들이 정권에 아부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평하며 그 때문에 ‘동천’이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같은 시가 빛을 잃었다고 했다.

아울러 일부 문학지나 문예지들이 돈을 받고 오히려 원고를 싣는 행태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그는 “지금은 그런 부류의 사람은 줄었지만 추천이라는 이름으로 장사하는 사람이 있어 문단의 물을 흐리게 한다”며 “문인들에게 있어 원고료는 일종의 생명줄인데 그것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건강 악화에도 쉬지 않고 창작

충주시 교현동에 위치한 예성공원에 가보면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잔디밭 한가운데 서있다. 책 모양으로 세워진 문학비는 청빈한 삶을 지키는 강직한 선비작가 강준희 선생을 닮은 듯하다. 선생은 7회 농민문학 작가상, 제1회 전영택 문학상, 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고 2015년 명작선 ‘한국을 빛낸 문인’에 선정됐다.

또 최근에는 앤솔러지에 대상 수상작으로 수록된 ‘고향역’을 비롯해 ‘서당 개 풍월을 읊다’, ‘우리공원 이야기’ 등 8편의 작품이 수록된 ‘강준희 문학상수상작품집’을 발간했다. 전영택문학상 수상작이 ‘서당 개 풍월을 읊다’이다. 이 소설은 1년여 간 각고의 노력 끝에 내놓은 작품으로 개를 의인화해 어지러운 인간 세상을 호통과 풍자, 해학으로 통렬히 고발한 우화소설이다.

방문과 유리창을 제외한 사면이 책으로 가득한 집필실 ‘몽함실(夢含室)’은 선생이 꿈을 먹고 사는 공간이다. 아직도 육필원고를 고집하며 창작활동에 몰두하는 선생에게는 닳을 대로 닳아버린 국어사전이 절친한 벗이다.

선생은 고령에다 몇 년 전 녹내장 수술이 잘못돼 한쪽 시력을 잃었다. 그래서 대형돋보기로 간신히 글자를 읽고 있다. 또 10년 이상 시달려 온 불면증으로 최근에는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해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됐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자 오늘도 몽함실에서 원고지에 한자 한자 적고 있다.

충주지역 한 작가는 “선생님은 그동안 현대인들이 잊고 지내는 ‘정신’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다”며 “악화된 건강에도 식지 않는 열정으로 집필활동에 임하는 모습은 많은 후배 작가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거실 한쪽에 쌓여 있는 원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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