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의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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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의 여운
  • 충청리뷰
  • 승인 2018.01.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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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윤 정 충북청주경실련 사무처장

2017년 마지막 날 영화 <1987>을 봤다. 엔딩크레딧에 흘러나오던 ‘그날이 오면’ 노래에 눈물이 쏟아졌다. 연세대 86학번부터 17학번까지, 세대를 아울러 구성한 <이한열 합창단>이 직접 부른 곡이었다고 한다. ‘노찾사’가 부르던 느낌과 또 다르게 마음을 울렸다. 이한열 장례식 날, 고 문익환 목사께서 피를 토하는 듯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던 장면,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행진하던 장면, 서울시청 앞에 운집한 1백만 명의 인파…. 빛바랜 영상 속 30년 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987년 당시 난 대학교 4학년이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정국에 학생들은 수업거부로 맞섰다. ‘가투’ 경력도 없는 친구들이 겁도 없이(!) 거리로 나갔다. 나도 그런 무리들 중의 하나였다. 지금처럼 집회의 자유가 없으니,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차도를 점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경찰에 쫓겨, 최루탄을 피해 골목으로 도망 다니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면 그때 만난 사람들이 생각나곤 한다.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간 허름한 여관의 주인아저씨는 주변이 고요해질 때까지 쉴 수 있게 해줬고, 노점상 아주머니는 영화에서처럼 바가지로 물을 퍼주며 우리를 격려했다. 이른바 ‘지랄탄’의 파편에 맞아 팔뚝에서 피가 나자, 시위대 언저리에 있던 어떤 아저씨는 약국에 가서 응급조치라도 하자며 내 팔을 끌었다. ‘넥타이 부대’ 직장인들은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으라며 창문 밖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줬다. 그러나 6월 아스팔트는 뜨거웠다.

“야, 이제 체력 달려서 못 나가겠다.” “아이고, 공부가 제일 쉬운 거였어.” 친구들이 하나둘 지쳐갈 무렵 노태우의 6.29 선언이 발표됐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2017년 여름, 나는 영화보다 먼저 내가 살았던 ‘1987’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NGO 활동가들의 이야기책인 『좋은 세상 설계자들』 출간 덕분이었다. 인터뷰어는 집요하게 ‘어쩌다’ NGO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마흔이 넘어 활동가가 된 연유가 무엇인지 캐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1987년 6월항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큼의 싸움을 한 것도 아니었으나 돌아보니 1987년의 체험은 내게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다.

짧은 직장생활을 마치고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 여성이 된 나는 마흔이 넘어 NGO에서 새로운 길을 걷고 있고, 그때 함께 한 친구들도 제각기 다른 역사를 쓰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귀농한 남편 덕에 ○○댁이 된 A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생활정치를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고, 시위 현장에서 남편을 만난 B는 광화문 촛불을 지키며 여전히 행동하는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든 야무지게 해냈던 C는 된장·고추장도 집에서 담가 먹는 살림 고수가 됐고, 뒤늦게 디자인을 공부한 D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전문가가 되어 있다. 인도 여행을 꿈꾸던 자유로운 영혼 E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농민운동을 꿈꾸던 친구 F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 <1987>을 보며 과연 묵묵히 역사를 끌고 가는 주역은 누구인지 자문해 본다. 웹툰 <송곳>의 대사처럼 불의한 세상을 견딜 수 없는 누군가, 누구보다 원칙적이고 바르게 살고자 한 시민들이 송곳처럼 삐져나오고 균열을 내지 않던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물꼬를 트지 않던가? 누군가는 어차피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라고 절망할 때, 미련스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이들이 있지 않던가?

“고모, 전 우리나라에 이런 역사가 있는지 몰랐어요. 영화에 나온 인물들이 자랑스러워요.” 미국에서 온 조카가 우연히 영화 <1987>을 봤다며 당시 이야기를 묻는다. “그럼, 고모도 그때 서울시청에 모인 수많은 점 중의 하나였지.”
2016년 말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촛불을 경험한 이들은 30년 후인 2047년쯤, 다음 세대에게 자랑스레 촛불혁명 이야기를 들려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차근차근 한걸음씩 2018년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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