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외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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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외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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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0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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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집 <엄마야 누나야> <정지용 전집 1>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
이 안 시인〈동시마중〉편집위원

올 들어 ‘음미(吟味)하다’란 말이 좋아졌다. 시가를 읊조리며 그 맛을 감상하다. 어떤 사물 또는 개념의 속 내용을 새겨서 느끼거나 생각하다. 음미하다는 새기다와 가깝다. 잊지 않도록 마음속에 깊이 기억함. 되풀이하여 곰곰 생각하면 되새기고 곱새기고 곱씹는 것이 된다. 되새기고 곱새기고 곱씹으려면 지치지 않도록 그 맛이 좋아야 하겠다. 좋아함에 지침이 있어선 새김을 이어갈 수 없겠기에.

좋아하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좋아하려면 무엇보다 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여야 하고, 언제나 마르지 않는 원천이 그에게 있어서 나에게 흘러옴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동시(童詩)가 나에겐 그여서 올해는 더욱 그를 내 깊숙이 끌어들이기로 하였다. 방법은 간단하다. 필사와 암송. 둘 다 대상을 내 것으로 삼겠다는 욕망이 강하다. 외워서 잊지 않기 위해, 음미하고 새길 것. 필사하고 암송할 것.

이리하여 나에게 ‘2018년은 동시 100편 암송의 해’가 되었다. 준비물은 별스럽지 않다. 손에 착 쥐여지는 감촉 좋은 수첩 하나와 연필, 지우개만 있으면 된다. 수첩은 100편을 온전히 옮겨 담을 수 있는 두께면 더 좋다. 이를 위해 몇 해 전부터 조금씩 준비해 온 것이 있다.

암송 동시 100편을 하나하나 고르고 모으는 일. 저 멀리 정지용, 권태응에서부터 최근 나온 젊은 시인의 동시집까지 두루 섭렵하며 암송 동시의 정전(正典)을 가려 왔다. 동시집만이 아니다. 시집에서도 가끔 동시 보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반칠환의 ‘새해 첫 기적’이나 함민복의 ‘나를 위로하며’, ‘섬’, ‘뻘’, 고형렬의 ‘두루미’ 같은 작품은 시집에 실렸으나 동시로, 그중에서도 암송 동시로 삼아도 좋을 만큼 고전적 격조가 있다. 필사와 암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이다. 어떤 작품을 필사하고 암송할 것인가.

암송 동시의 특성을 고려할 때, 특히 어린이부터가 이 프로젝트의 참가자임을 고려할 때 작품의 분량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령 정지용의 ‘해바라기 씨’는 형식과 내용이 모두 암송 동시의 특성에 부합하는데도 6연 17행의 짧지 않은 분량은 선뜻 이 작품을 암송 동시로 선정하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형식이다. 행과 연의 배치가 내용 전개에서뿐 아니라 시각적 구도에서도 알맞은가, 온점 반점 등 문장부호가 적절히 쓰였는가, 대구와 반복, 리듬이 내용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러운가.

동시 맛보는 즐거움

내용에서는 말의 깊이와 품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표현된 것만큼이나 표현되지 않은 여백, 공란마저도 음미하고 새기고 외워 간직할 만한 것인가. 손쉽게 자기를 허락하지 않는, 의미화되지 않으려는 음악이 간직되어 있는가. 이 과정에서 동시라는, 매우 독특한 장르 특성이 종합적으로 고려될 수밖에 없다.

암송 동시로 적합한 것은 역시 정지용 같은 대가의 작품이다. 지용의 작품은 행에서 행으로 옮겨감과 연에서 연으로 건너뜀, 반점과 온점의 유무 하나하나가 모두 불가피함의 산물로 짜여 있다. 음미하기에 지용의 동시처럼 잘 어울리는 텍스트는 우리 동시 100년사에 아직까지도 드물다. 그것은 쓰는 자로서의 지용이 형식과 내용에서 엄격을 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지용 전집 1>(민음사 1988)이나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권영민, 민음사 2004)가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우선 <엄마야 누나야>(겨레아동문학선집 9권, 보리 1999)에 실린 작품부터 음미해도 괜찮다.

‘바람’에서는 행과 연의 전개와 배치, 온점과 물음표와 느낌표의 사용을 각별히 음미해 보고, ‘별똥’에서는 ① 처음<학조>(1926. 6)에 산문으로 발표된 것(“별똥이 떨어진 곳을 나는 꼭 밝는 날 찾아가려고 하였었다. 벼르다 벼르다 나는 다 커 버렸다.” )→② 동시로 고쳐 <학생>(1930. 10)에 발표된 것(“별똥 떨어진 곳,/ 마음해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③<정지용시집>(1930)에 실리면서 각 행을 연으로 분리하여 완성한 것(“별똥 떨어진 곳,// 마음해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의 차이를 예민하게 음미해 보라. 있고 없음, 가까움과 멂에 다 이유가 있다.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게 재밌어서,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하는 게 더 재밌어서 ‘동시 외우는 시간’을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8204)로 방송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수첩에 또박또박 동시를 옮겨 적고 한 글자 한 글자 맛보며 외우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새롭다. 전국 각지에서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함께한다는 기별이 오니 먼 곳의 벗이 찾아온 듯 반갑다.

단순함 속에 깃든 깊이와 음악, 얼핏 쉬워 보여도 동시는 인생과 세계의 말할 수 없음에 닿아 있다. 그래서 쉽지 않다. 그것을 음미하는 시간이 각별나서, 지치지 않고 좋아할 만한 것이 동시임을, 동시를 외우며 다시 또 알겠다. 그런데 동시 100편을 다 외워 내 안에 갖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벌써부터 다른 사람이 된 듯 나는 내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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