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운명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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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운명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
  • 충청리뷰
  • 승인 2018.04.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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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황오동 이상우 원장의 한옥에 들어선 <오늘은 책방> <사랑방 서재>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대신 목련이 절정이었다. 대릉원 한가득 노란 산수유와 목련의 고운 자태가 마음을 흔들었다. 산골마을엔 아직 오지 않은 봄꽃들의 향연, 훈훈한 바람과 따가운 봄볕이 남녘임을 일깨웠다. 그리고 사방에 높은 것이라곤 전봇대 뿐인 한옥 주택가, 골목 안 마당넓은 한옥집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거칠 것도 없고 푸른색 그대로 맑아서 좋았다. 여기는 경주시 황오동, 동네 서점 <오늘은 책방>과 <사랑방 서재> 북스테이가 한 지붕 두 살림을 차리고 있는 곳이다.

원래 이곳은 <사랑방 한의원>을 운영하는 이상우 원장의 자택이었다. 책을 좋아해 한의원 한 켠에 서가를 꾸리고, 몸이 아픈 환자들에게 책을 권하던 그는 비어있는 방을 게스트하우스로 단장했다. 작은 책방을 겸한 북스테이를 하고 싶었던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음악가 부부에게 이곳에서 서점을 열 것을 권했고 <사랑방 서재>가 만들어졌다.

그림책방 <소소밀밀>의 해질녘 아름다운 모습.

책방, 작은 사랑방 역할

이렇게 두 가족이 서점과 북스테이를 시작했지만 각자 직업이 따로 있다보니 운영이 원활치가 않았다. 그러던 중 1년 전 서점을 시작한 <오늘은 책방>이 이사를 해야 했고 이상우 원장은 자신의 한옥집에 책방을 입점시켰다. 결혼과 함께 인생의 새 출발을 서점으로 시작한 20대 젊은 부부, 자신의 꿈을 그들에게 투사해 응원과 연대의 손길을 내민 인생 선배들. 이렇게 협업은 이루어졌고 이 아름다운 한옥집은 동네 서점과 북스테이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했다.

“저희 부부는 사회복지를 전공했어요. 책방을 하게 된 이유도, 책방을 구실로 사회복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인데요. 동네 어르신이 마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이웃들이 함께 모여 영화도 보고, 수다도 나누면서 지역에 이웃이 살아나고 지역사회가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사랑방 서재>와 <오늘은 책방>의 주인장들.

책방을 여는 사람들마다 나름의 사연이 없을까마는 <오늘은 책방> 주인장들 만큼 독특한 이유를 댄 사람은 처음이다. 사회복지의 장으로 책방이라니. 실제 그들이 책방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일들도 어쩌면 책방보다는 작은도서관에 가까운 활동들이어서 오래 작은도서관 활동을 해온 내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이곳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보다 다채로운 소모임 활동들이다. 잡지읽기 모임, 소리내어 책읽는 모임, 경주 책모임, 수다모임, 여행을 주제로 한 자유모임, 한 달에 한 번 이웃주민과 함께하는 작은 상영회까지. 말 그대로 지역주민들의 작은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은 책방>이 입점하고 나서 <사랑방 서재> 한 칸은 오롯이 북스테이 숙박 손님을 위한 서재가 되었다. 운영자 이지훈·고지영 씨 부부는 주 2회 정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북스테이를 통해 만나길 원한다. 유흥만을 목적으로 오는 관광객들 말고 길 위에서 조용히 나를 만나고, 책이 있는 집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만 이 아름다운 한옥에서의 하룻밤을 선사하려고 한다.

그림책방 <소소밀밀> 내부

관광지 팬시상품이 된 책

다음날 아침, 그 유명한 ‘황리단길’을 걸어본다. 원래 있던 황남동이라는 지명을 놔두고 서울에 관광객들이 몰린다는 ‘경리단길’을 본따 이름마저 바꿔버린 곳. 이렇게 상업주의에 노출된 도시는 왜곡되고 문화는 비틀린다. 그곳에 책방들이 여럿 생겨났다. 마치 아픈 마음에 처방을 받은 듯 약봉지에 책을 싸주어 젊은 관광객들에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어서어서 책방>. 정갈한 모습으로 독립출판물을 전시 판매하고 있는 <책방 지나가다>와 <누군가의 책방>. 그리고 그림책방 <소소밀밀>.

한옥 <오늘은 책방>의 독특한 문

<소소밀밀>은 일러스트레이터 부부가 문을 연 그림책 서점이다. 화가의 선택을 받은 책들이니만큼 이곳엔 완성도 높고 예술성 뛰어난 그림책들이 가득하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탄성을 지르며 들를만한 작고 예쁜 책방. 그러나 관광객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사진만 찍고 소란을 떨다 책은 사지 않고 나가는 모습이 싫어 책방지기 구서보 씨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정했다. 평일임에도 사람들로 가득한 황리단길의 소란스러움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에 치여 괴로워하는 책방지기의 마음 한 켠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오늘은 책방> 내부

어느새 도시마다, 지역마다 이렇게 작은 책방들이 생겨나고, 관광지의 인기있는 핫 플레이스로 화제를 모으는 이런 현상들. 어느새 책은 콘텐츠 자체의 인문성보다 관광지 팬시상품으로 더 인기를 끌고 있으니 그렇더라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 손에 든 책 한 권이 SNS에 인증샷으로만 남더라도 그렇게라도 소비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세상은 변하게 마련이고 문명은 진화할 터이니 과연 책의 운명은 어디까지일지 갈 데까지 한 번 가보자, 경주에서 새삼 그런 각오를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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