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동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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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동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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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2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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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인의 <동심언어사전>
이 안 시인〈동시마중〉편집위원

이정록 시인이 얼마 전 재미있는 책 한 권을 냈다. 복합어를 제목으로 쓴 시 316편을 묶은 <동심언어사전>(문학동네 2018)이다. 「가갸날」을 맨 앞에 놓고 맨 나중에 「힘줄」을 놓았다. 두 번째 자리에 실린「가난살이」를 보자. “과실나무는/ 해거리를 한다/ 한 해는 많이 맺었다가/ 한 해는 적게 맺는다/ 가난살이로 힘을 얻는다/ 해거리가 어려우면/ 하루라도 가난살이를 하자/ 한 끼니라도 걸러보자/ 삽과 가방과 운전대를/ 이틀만이라도 내려놓자/ 추위를 겪어야 꽃이 피는/ 엉겅퀴, 냉이, 꽃다지처럼/ 소나무, 동백나무, 산수유처럼/ 가난살이를 즐기자/ 꽃눈에 힘 모으고.”(전문)

‘넉넉하지 못하고 쪼들리게 살림을 차려서 사는’ ‘가난살이’가 한 해를 거른다는 ‘해거리’로 의미 이동하면서 시가 발생한다. 넉넉하지 못한 현재의 쪼들린 살림살이가 힘을 얻기 위한 해거리의 가난살이로 거듭났다.

한 작품 건너뛰면 「가로쓰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재미나다. “땅바닥에 애호박 하나씩 놓고 가는/ 호박넝쿨의 가로쓰기가 좋다/ 바다를 건너는 배의 하얀 물띠가 좋다/ 대륙을 잇는 철길의 가로쓰기가 좋다/ 네게서 건너오는 따스한 눈길이 좋다/ 풀밭을 찾아가는 누떼의 삐뚤빼뚤한 밑줄이 좋다/ 강까지 달려온 얼룩말들의 천릿길 흙먼지가 좋다/ 강남에서 날아온 지친 제비를 앉히려고/ 겨우내 흐헝흐헝 울던 전깃줄의 가로쓰기가 좋다/ 네가 고개를 끄덕일 때보다는/ 가로저을 때, 더 어여쁘다.”(전문)

가까운 애호박에서 출발한 가로쓰기는 바다를 건너는 배의 가로쓰기(시각)가 되었다가 대륙을 잇는 철길의 가로쓰기(시각과 청각)가 되며, 네게서 건너오는 따스한 눈길(촉각)의 가로쓰기가 된다. 누떼와 얼룩말들을 불러와 아프리카를 보게 한 다음, 시는 다시 출발의 자리인 지금, 여기로 돌아온다.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들이 지친 날개를 쉬는 골목의 전깃줄을 지나면 네가 사는 집이 나올 것 같다.

<동심언어사전>이니 동시가 아니 있을 리 없다. 갈피갈피 나오는 동시가 맛있다. “땀 흘려 일할 때/ 몸은 보석 상자가 되지// 구슬구슬 송알송알/ 구슬이 쏟아지지.”(「구슬땀」 전문) “출생 기념으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지요/ 정말 소중한 것이라서/ 뱃속 깊은 데다 채워주셨지요/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풀어볼 수 없어요.”(「배꼽시계」전문) 시는 시대로, 동시는 동시대로 이정록 시인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반짝인다.

시인의 유쾌한 발견, 복합어

복합어는 우리말로 ‘겹낱말’ ‘범벅말’이라고도 하는데 시인은 이를 ‘만남언어’ ‘동심언어’ ‘팔짱언어’로 불러도 좋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언어와 언어의 만남에 동심의 작용이 있었다고 본 것이 새롭다. 머리말에서 두 문단을 읽어본다.

“동심이 없으면 언어는 빛나지 않는다. 낱말과 낱말이 만날 때 둘은 어린아이처럼 껴안는다. 언어는 동심의 놀이터다. 태초에 동심이 있었다. 하나의 언어는 자의적으로 생겨나지만, 낱말과 낱말이 만나 ‘겹낱말’이 될 때에는 의미 전달이라는 실용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꽃봉오리가 펼쳐진다. 두 단어가 ‘범벅말’이 되는 과정에 재미가 끼어들고, 마음의 기원이 깃든다. 키득거림과 박수소리와 어깨동무와 얼싸안음이 생동한다.”

동심언어사전이정록 지음문학동네 펴냄

나는 이것을 실로 유쾌한 발견이라고 하고 싶다. 복합어의 기원에 동심의 태초가 있었고, 놀이와 재미의 어린아이가 뛰놀았다니 이것만큼 즐거운 발견이 있기 어렵다. 복합어를 명상하는 것만으로 상상력이 발동하고 시의 태기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도둑놈의갈고리, 까마중, 애기똥풀, 사슴벌레, 개구리발톱, 각시나방, 각시붓꽃,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 저어새, 깻망아지 같은 말은 매우 혼종(hybridism)적 작명이어서 떠올려 발음해 보는 것만으로 매혹적인 판타지를 발생시킨다.

가령 도둑놈의갈고리는 풀이름인데 ‘도둑놈(사람)’과 ‘갈고리(사물)’라는 엉뚱한 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고, 까마중은 형용사의 어근 ‘까맣-’과 ‘중(스님)’의 어감을 포함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개구리에게는 발톱이 없는데 개구리에게 발톱을 갖다 붙이더니 느닷없이 풀이름에 달아준 것이 개구리발톱이다. “태초에 동심이 있었”고, “언어는 동심의 놀이터”라는 이정록 시인의 말에 수긍이 간다.

이정록 시인은 시와 동시, 청소년시, 그림책, 동화, 산문 등 다방면에 걸쳐 글을 쓴다. 만해문예학교 교장을 맡아 사람과 시의 현장을 가꾸는 일에도 부지런하다. 이 책이 시집으로는 열 번째다. 묶인 작품이 316편이니 한 권이지만 다섯 권 분량이다. 그의 생애 최후 모습이 이와 같으리라고 믿는다. “죽을 때까지 쓴다// 숨 끊긴 지 한참 지났는데// 기필코 벌떡/ 깨어 일어나서 펜을 잡는다// 부스스/ 유언을 퇴고하다가/ 다시 죽는다// 나머지 반은/ 언제든 돌아와 마저 고치겠다는 듯// 펜을 꼭 쥔 채/ 검은 사색에 든다.”(「글쟁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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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영 2018-04-26 19:19:24
시어가 참 예뻐서 끝까지 읽게 되네요.
'꽃눈에 힘 모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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