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섯살 청년이 차린 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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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살 청년이 차린 문화공간
  • 충청리뷰
  • 승인 2018.05.1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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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 리모델링해 작은 책방 만들어

 미세먼지 가득하던 4월의 흐린 하늘이 걷히고 초록 언덕 위로 5월의 푸른 하늘이 활짝 열렸다. 그렇지, 이게 우리의 하늘이지. 교과서에 자랑처럼 실려있던 높고 푸른 한반도의 하늘. 어쩌면 머지않은 날에 백두산에서, 개마고원에서도 이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겹쳐 5월이 더욱 반가웠다. 그 맑은 하늘을 기념하여 길을 나섰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덕평리. 고속도로를 오가는 우리에게 마장 휴게소와 덕평 I.C로 낯익은 그 동네에 시골 책방 하나가 새로 문을 열었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나오자마자 5분 거리에 있는, 개발로 어수선한 도로변과 달리 골목 하나 들어갔을 뿐인데 오래된 길과 마당이 그대로 남아있는 작은 섬 같은 동네. 거기 동화처럼 지붕 낮은 집 세 칸이 나란히 서 있다. 순식간에 세월을 뛰어넘어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신비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집이다. 솜씨 좋은 안주인이 푸근한 인상으로 차를 끓이고 자수를 놓고 있을 것만 같은 이 집의 지킴이는 뜻밖에도 스물 여섯 ‘어린’ 청년.

책방 ‘오월의 푸른하늘’ 내부 모습.

“어릴 때는 부모님에 의해 강제적으로 독서를 했던 것 같아요. 책 읽는 즐거움을 전혀 느껴보지 못한 채 숙제로만 책을 읽었죠. 그런데 일본에서 유학할 때 쓸쓸하니까 책을 보게 됐어요. 누구의 강요가 아닌 순전히 외로워서, 필요해서, 자발적으로 책을 읽게 된 거죠. 스물 다섯 살 때 <아홉 살 인생>을 읽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게 몰입해서 읽은 독서의 경험이 처음이었어요. 읽으면서 펑펑 울었지요.”

일본 유학 때 발견한 ‘책’
외로운 유학생 청년 최린은 뜻밖에도 책이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쉬는 날이면 도쿄에 있는 책방들을 돌아다녔다. 특히 진보초 헌책방 거리에 그림책만 파는 할아버지 가게가 있었는데 그분이 ‘그림책은 정작 어른이 읽어야 하는 책’이라 말씀하시며 좋은 책을 많이 권해주셨다. 그런 경험과 만남이 쌓여 건축과 국제사회학을 공부하던 대학생은 자청해 시골책방 책방지기로 들어앉았다.

지붕 낮은 집 세 칸 중에 한 칸은 할머니가 오래 전부터 살고 계시던 집이다. 그 옆 한 칸은 건축일을 하던 어머니가 작업실 겸 공방으로 사용해왔고, 옛날에 소를 키우던 외양간이던 곳을 이번에 리모델링해 책방으로 꾸몄다고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본가는 이곳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더 가야 하지만 어릴 적부터 이 공간을 드나들며 놀고 다양한 체험 활동들을 했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집이다. 이곳에서 작은 책방을 열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고 톱질을 하고 선반을 만들어 아들의 독립을 도왔다.

책방의 내부 모습.
책방주인 최린.

“살펴보시면 간판에도, 어디에도 책 혹은 책방이라는 말이 없어요. 굳이 그 단어를 넣지 않았던 건 이 공간이 책방이라는 단어로만 규정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인데요. 가족들이 다함께 즐길 수 있는 따뜻한 공동체 문화 공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책·영화보고 벼룩시장도 열 계획
단순히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스터디 모임을 꾸리고, 이웃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주말이면 마당에서 벼룩시장도 열면서 지금은 잃어가는 시골다운 문화와 체험의 장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장기적으로 수익을 생각해서 음식점 등록도 했지만 아직 차나 음료를 팔지는 않는다. 대신 이곳에는 누구나 무료로 음료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손님들의 냉장고’가 있다. 이 외지고 낯선 곳까지 일부러 찾아주시는 분 들에게 작은 정성을 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적을 바랐다고 한다. 모두가 함께 채워가는 공유 부엌의 기적. 책방 문을 연 지 한 달 남짓, 청년은 그 기적을 조금씩 체험해가고 있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음료수를 꾸러미로 사다주시는 분, 적자 나면 어떡하냐며 먹을거리를 채워주시는 분, 심지어 잘 먹어야 한다며 고기까지 사다 냉장고에 넣어주신 이웃들 덕분에 제공하는 것 이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며 활짝 웃는다.

이제 회원 20명을 모았지만, 책방지기 ‘레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 청년은 매달 회원들에게 손글씨로 쓴 ‘오늘(오월의 푸른하늘)의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고, 책을 사면 정성스레 포장을 해주고, 직접 내린 커피를 제공하면서 방문객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일상이 고맙고 행복하다. 앞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책방 회원을 대상으로 북스테이도 시작하려고 지금 방 한 칸을 공사 중이다.

동화에 나오는 집 같은 책방 전경.

아아, 두 시간 남짓 볼 빨간 젊은 청년의 꿈과 미래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뛰었다. 도시가 아닌 시골을 선택하고, 그럴듯한 대기업이 아닌 작은 책방 지기가 되기로 한 이 청년의 아름다운 실험이 부디 기적을 이루어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책 몇 권을 사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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