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림책 문화의 풀뿌리 어린이 전문서점
상태바
일본 그림책 문화의 풀뿌리 어린이 전문서점
  • 충청리뷰
  • 승인 2018.06.21 1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3년간 미에현에서 자리 지키는 서점 <메리고라운드>

최근 일본에서는 독특한 책이 한 권 출간되었다. 일본의 북 디렉터가 서울에 새로 생겨나고 있는 독립서점 열풍을 취재해 책을 펴낸 것이다. 이 책에는 서울 동네 서점 주인들과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출판인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책을 쓴 저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생겨나는 서울의 책방들에서 일본에 없는 역동성을 발견했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말한다.

벌써 십 수 년째, 일 년이면 한 두 차례씩 일본의 서점과 도서관을 돌아보고 있는 나는 한 편으로는 그들의 놀라움을 이해할 것도 같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도쿄의 대형 서점에 진열된 풍부한 콘텐츠와 부가상품들에 놀랐다. 어린이만을 위한 전문서점, 동네 곳곳에 숨어있는 작은책방들과 오래된 헌책방 거리에서 느껴지는 전통과 전문성에 놀라고 또 부러워했다. 책을 매개로 해서 파생되는 수많은 부가가치들은 탄탄한 콘텐츠의 힘을 느끼게 했고 작지만 강한 다종다양한 공간들은 저마다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일본도 여지없이 출판시장이 축소되면서 새로운 발견은 줄어들었고 책 읽는 인구는 노령화되었으며 공간은 낡아졌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서는 최근 5년 내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새로운 책공간들이 만들어졌다. 도서관은 변화 발전했고 다양한 형태의 동네 서점들이 되살아났다. 이들은 내가 예전에 지도 한 장에 의지해 일본의 골목골목을 뒤져가며 찾아냈던 서점들보다 새롭고 역동적이다. ‘한국을 너무 몰랐다’고 하는 일본 북 디렉터의 한탄을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청년기에 서점 시작해 이제는 노인
그러나 겉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골목을 오래 지켜온 동네 책방들은 거기에 머물렀던 이들의 깊은 숨결만큼이나 켜켜이 이야기가 쌓여 있고 그 힘은 그리 가볍지 않다. 일본의 거리와 백화점, 공간의 풍경을 변화시키고 있는 ‘츠타야 서점’이나 ‘무지북스’같은 대기업의 진화는 결코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응축된 이런 이야기들의 토대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어린이 전문서점을 중심으로 피어난 일본의 그림책 문화도 이런 토대 가운데 하나다. 이번에는 미에현에 있는 <메리고라운드> 어린이 전문서점을 방문했다. 이곳의 주인은 청년기에 서점을 창업해 4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스다 요시나키씨. 주위가 논밭 뿐이던 진흙탕 한가운데 서점을 열었다. 그보다 2년 전에 나고야에서 문을 연 어린이 서점 <메르헨 하우스>를 가보고 바로 이거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작은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책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가졌고, 자신도 그런 서점을 만들고 싶었다.

서점에 가면 아저씨가 아이들과 놀아주고, 책을 읽어주고, 무엇이든 물어보면 그에 맞는 책을 척척 꺼내줄 수 있는 그런 서점을 꿈꾸었다. 논밭 사이에 있는 서점. 진창길을 가로질러 온 아이들이 진흙 묻은 발로 뛰어다니고 흙 묻은 손으로 책을 만져도 기뻤다. 그래도 와주는 게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아이들이 언젠가는 여기 의자에 앉아 차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올 거라 믿었다.

지방의 작은 서점이라고 도매상에서 책을 공급해주지 않아 자동차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나고야까지 가서 원하는 책을 골라 짊어지고 왔던 책방 아저씨. 일반적으로 아이들 육아를 책임지는 엄마들 뿐 아니라 남자들이 아이를 알아야 사회가 좀 더 어린이들이 살기 좋은 사회로 변화한다고 믿었던 책방 주인.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가 어른도 행복한 사회라는 걸 일찌감치 알았던 그는 남자들을 모아 독서모임을 꾸렸다.

도쿄에 있는 대표적 어린이 서점인 <크레용 하우스>와 나고야 <메르헨 하우스> 그리고 미에의 <메리고라운드>는 일 년에 한 번씩 200~300명이 함께하는 연합 독서 캠프를 열었다. 무엇보다 이 캠프는 어른들을 위한 독서 캠프. 어른이 먼저 변하고, 어른이 그림책을 알아야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런 캠프가 오늘날 일본의 어린이책 문화를 만들어가는 풀뿌리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연합 독서캠프 구성
안타깝게도 뜻을 함께하던 나고야의 <메르헨 하우스>는 지난 달 45주년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책보따리 짊어지고 다니던 젊은 청년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메리고라운드>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척박했던 시절 이들이 꿈꾸고 이들이 만들어왔던,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에 대한 꿈은 충청도 시골에서 그 먼 미에현 시골까지 책방 하나 보겠다고 달려간 한국의 책방지기에게로 이어지고, 이런 꿈들이 별처럼 점점이 박히면 언젠가 반드시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 번 되뇌어본다.

한국이 열광하는 츠타야 서점의 북 큐레이션도, 무지북스의 라이프스타일 디자인도 이렇게 소리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지역의 이야기들을 쌓아왔던 작은 가게들로부터 발원한 것이니 부디 지금 열광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동네 책방들의 면면을 잘 지켜주시라, 또 빌어보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