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안희정 이재명은 정말 끝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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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안희정 이재명은 정말 끝났을까?
  • 충청리뷰
  • 승인 2018.06.2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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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안희정과 이재명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주목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여론재판을 받은 것도 이채롭다.

우선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되는 도덕성에서 둘은 일단 낙제점이다. 여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도 그렇고 형수에 대한 막말과 여배우와의 섬싱(something)도 그렇다. 당사자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국민들은 모든 걸 팩트로 받아들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있다. 안희정의 경우 졸지에 바닥으로 떨어져 야인의 신분이 된 것에 대해 묘하게도 동정론이 조금씩 늘어나는 반면, 이재명과 관련해선 본인이 온갖 공격을 극복하고 경기도지사를 거머쥔 이상 동정론보다는 향후 역할론에 더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다시 말해 안희정이 국민감정의 변화여부에 따라 정치적 기사회생을 꾀할 수 있다면 이재명은 앞으로 그가 추구할 일과 업적으로써 다시 대권의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둘은 각각 지도자로서 그동안 보여온 이미지만으로도 남들이 쉽게 범접못할 막강한 상품성을 가질 수 있었다. 안희정은 차세대 리더답게 충남도정을 원만하게 이끌다가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선 불출마를 선언해 일찌감치 차기권력의 포스트로 부상했고, 이재명은 다 쓰러져가는 성남시를 되살려냈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얼마든지 향후 정치적 탄력이 가능했다.

물론 이재명이 자신의 취임과 동시에 성남시의 파산을 경고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가 8년 후 퇴임을 앞두고선 채무 제로(0)를 천명한 것은 여전히 논란을 빚는다. 반대진영에선 다분히 정치적 계산과 전략이 깔린 위선과 숫자놀음이라는 비판을 가하지만 그는 자치단체 부실의 상징이었던 성남시를 정상화시킴으로써 누구보다도 차별화된 능력을 인정받았다. 경기도지사 당선 후 그가 누차 강조한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말은 이런 자신감을 배경으로 한 “반드시 일을 내겠으니 지켜봐 달라”는 공언으로도 들린다.

안희정과 이재명의 사례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지도자의 자질이나 덕목에 있어 과연 어느 것이 정답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지도자가 국가와 사회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물론 나라를 이끌겠다는 지도자들이 모든 요건을 다 갖췄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현실은 안 그렇다. 리더의 자질에 있어 가장 기본이라는 능력이나 도덕성, 인간성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어느 특정 지도자가 이 모든 장점을 다 갖춘 적은 없다. 이 것이 좋으면 저 것이 나쁘고 이것에 능력이 있으면 저 것은 마음에 안 들고 식이다.

안철수를 예로 들어보자. 한 때 착한니즘 정치의 아이콘이던 안철수가 또 위기에 몰렸다. 인간성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바람직한 리더십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만약 안철수가 좀 더 투쟁력이나 상황에 따라선 쌈닭의 기질을 갖췄다면, 결국엔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백해무익했다는 동네북이 되지는 않았다. 잘 나가나 싶다가도 때만 되면 모든 걸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물(水)철수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만 봤다하면 못된 손버릇의 트럼프는 도덕적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그는 미국이라는 자국과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리더십으로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만약 트럼프의 막가파식 뻥정치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북한변화와 남북화해는 불가능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좀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트럼프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헷가리는, 그러면서도 결과적으론 대단한 성과를 내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에게 리더의 도덕성을 얘기하는 자체가 이젠 허허롭게 됐다.

우리에게 영원한 성군으로 통하는 세종임금도 실은 큰 과오를 저질렀다. 노예제도를 확대하고 기생(妓生)제도 또한 확충하면서 사대주의를 강화했다. 요즘 시각으로 치면 서민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기에 세종은 당대 양반들에게만 성군이었다고 냉혹한 평가를 내리는 학자도 있다.

폭군 연산군도 사화(士禍)를 겪기 전까지는 선정을 폈다. 사회의 퇴폐풍조와 부패를 일소하려 했고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민심을 살피며 관료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 또한 유능한 문신들에겐 장기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함으로써 학문의 풍토를 새롭게 했고 결과적으로 나라의 품격을 높이려 했다. 이와같은 사실에 천착한다면 세종은 그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 인간성은 좀 그렇다는 평가가 가능하고, 연산군은 비록 폭정으로 국정을 파행시킨 장본인이지만 리더의 또다른 핵심덕목인 나라의 비전제시가 분명했다고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태생적인(?) 선한 사람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대학에서 문 대통령과 고시공부를 함께한 과거 동료들은 이 때문에도 文이 정치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본인이 책으로 쓴 ‘운명’으로 밖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文에 대한 평가에서 그 동료들이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을 해도 쉽게 판단하거나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나설 일에 절대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 결국 문 대통령은 국가 리더로서 외형의 독한 성격은 못되지만 대신 리더의 또 다른 요건인 인간성과 일관성, 책임과 결단력은 확실함을 알 수 있다. 외유내강인 셈이다.

사업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보통의 일반인들과는 다른 강한 내성(耐性)과 근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대개 이러한 성격은 부하나 구성원들에겐 아주 냉혹한 지시와 몰아침을 가한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조직이 망해도 책임지지 않는 흐물흐물한 리더보다는 비록 당시는 힘들더라도 조직과 나를 책임져주는 지도자가 더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서점에 가면 리더십에 관한 숱한 책들이 나와 있지만 지도자의 자질을 획일적인 잣대로 재단할 수는 결코 없다. 현대 사회의 역동성과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고민해 봐도 그렇다. 그래서 요즘 가장 의미있게 회자되는 것이 창조적 리더십이다. 창조의 리더십은 결점과 단점에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이를 거울삼아 새로운 비전까지도 제시하는 능력을 말한다.

안희정과 이재명이 문제의 창조적 리더십으로 무장해 다시 ‘차기 대권주자’라는 고토를 회복할 지는 지켜볼 일이다. 차제에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충북의 리더들도 이런 사례들을 고민하기를 바란다. 말도 안되는 립서비스, 말장난으로 도민들을 현혹시키는 것은 더 이상 보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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