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다음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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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다음은 누구냐!
  • 충청리뷰
  • 승인 2018.07.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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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굳이 이런 제목을 단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노회찬의 황망한 죽음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처음 독백처럼 내뱉은 말이라는 점이다. 당장 드루킹 사건의 김경수와 조폭과의 유착설에 휩싸인 이재명이 거론됐다.

그래서 다소 무리임을 알면서도 글의 타이틀로 옮겨봤다. 이는 그의 죽음이 가져 올 향후 추이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고, 더 속내는 이른바 조문정국이 끝난 후 불거질 진보에 대한 마녀사냥의 불편함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이런 유형(?)의 죽음이 빚어질 때마다 또 한참이나 곱씹어야하는 일개 범인으로서의 낭패감이다. 꼭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그렇게 죽으면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는지, 그렇게 죽는다고 해서 과연 뭐가 달라지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역시 노회찬의 자살에 대한 언론보도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불법정치자금은 받았지만 청탁이나 대가성은 아니다’라는 산자들의 간교한 위무(慰撫)다. 이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다. 노회찬과 그가 이루어놓은 진보에 대한 냉소이자 더 나아가 저주의 덧칠일 뿐이다.

특검이 노회찬의 목을 점점 더 조여오고 어느덧 그 내용들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면서 나는 이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기를 내심 바랐다. 청탁이나 대가성이 아니었다면 불법 수수 사실을 깨끗이 인정하고 국회의원을 사직한 후에 야인으로 돌아가 수사를 받는 것이다.

이 게 상식적인 판단이고 바로 그 상식 때문에도 노회찬은 다시 자기의 삶을 추스렀어야 맞다.
사람들은 노회찬의 불법정치자금 4000만원 수수에만 주목한 게 아니다. 그 돈을 어떻게 받아서 또 어떻게 썼는지를 더 궁금해했던 것이다. 평소 그의 정치역정을 보아 문제의 돈이 정치 혹은 개인의 삶을 위해 합목적적인 곳에 쓰여졌다면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비굴해 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진보정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가난한 아내를 두고 늘 주변부터 챙겨야 했고, 그에게 실제로 4000만원을 건넨 사람이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젠 사람들이 그만 죽었으면 한다. 노회찬 같은 삶의 궤적을 밟아 온 사람이 죽으면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애먼 국민들이 같이 죽게 된다. 그는 자살의 유혹이 엄습하는 순간에도 13년 투쟁 끝에 복직이 결정된 KTX 여승무원과 함께하고자 했고 국민들의 분노를 사는 국가기관 특수활동비 폐지를 위한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동료의원들의 원망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국회의원 특권폐지 및 소수자 인권보호를 위해 온 힘을 던져 싸우던 중이었다.

정치의 불필요한 엄숙함을 난도질하고 바로 그 정치에 인간성과 유머를 채우며 국민의 품으로 안기려 했던 노회찬이 돌연 우리 곁을 떠났다. “50년 쓰던 고기판에 삼겹살을 구우면 까매진다”며 “이제 고기판을 갈아야 한다”고 외치던 그가 불판을 새 것으로 교체하기 직전에 좌절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지난 50년동안이나 그 고기판으로 삼겹살을 구우며 주지육림의 권력을 누리던 그들이 촛불을 짓밟아버리고 다시 돌아오려 했다. 양승태는 사법권을 가지고 기득권과 거래를 했고 군장성들은 계엄이라는 그들만의 잔치상을 놓고 숟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하지만 이 나라의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지켜냈고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던 두 명을 감옥으로 보냈다. 안 그랬으면 두 사람이 아닌 무수한 국민들이 지금 쯤 감옥에서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번 노회찬의 죽음에서도 확인됐지만 국민들은 유독 진보에 대해 더 도덕적 잣대를 요구한다. 진보건 보수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말이다. 노회찬도 생전에 이를 의식하며 자신들의 숙명이라고까지 했다. 그러기에 그가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고 해서 이 숙명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노회찬의 죽음은 오히려 그 숙명을 다시 한번 곧추세우는 계기가 됐고 우리 또한 그 이유를 재삼 분명하게 인식하는 중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저들은 나라를 좌우(左右)와 보혁(保革)이라는 이분법도 부족해 아예 선(善)과 악(惡), 더 나아가 빨갱이 논리로 이간질하며 한반도를 두 번이나 두동강냈다. 한번은 남북으로, 또 한번은 남쪽의 동서로 말이다. 이 것들의 원흉을 척결하기 위해선 진보는 도덕적으로 마지막까지 엄격해야 하고, 이는 한국적 정치토양에선 말 그대로 숙명이다. 이 숙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승화시킬 때만이 이 나라는 바로 선다.

노회찬은 바로 이 역사적 과업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용기있게 역할을 다하려 했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책임감 때문에 끝내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유서에 남긴 마지막 후회, 뜻이 좋더라도 현실의 룰(rule)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자책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 또한 숙명을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가 될 때까지는 흔들리지 말아야하는 진보의 숙명을 죽음으로써 웅변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이 벌써 진보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고 있다. 지금 가장 쾌재를 부를 이들은 감옥의 두 사람이라고도 한다. 이 와중에서 정작 여론에 치일 곳은 따로 있다. 문재인 정부다.

이해(利害)가 늘 충돌하는 국가통치와 정치에서 선의의 리더십은 분명 한계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통일의 지도자로 만드는데 파트너였던 김정은은 요즘 생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3대 독재의 절대세습자인 그는 어차피 모든 문제를 자신의 안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가 구사하는 전략은 결국 계산,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도 목하 김정은을 향해 큰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이 예의 트럼프식 돌발행동으로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에게 정치의 즐거움을 주던 노회찬도 갔고 경제는 어렵다고들 아우성이다. 이럴 때 국민들은 이런 바람을 가질 수 있다. 더 이상 탁현민식 쇼통은 그만 하라는 것, 국정에 확실한 변화를 주라는 것, 그러기 위해선 각료 등 사람들도 과감하게 교체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이다.
아무리 일잘하는 사람들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자만과 매너리즘에 빠진다. 노회찬이 남긴 교훈의 하나는 바로 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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