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자신으로 살고자 했던 한 평범한 여성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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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자신으로 살고자 했던 한 평범한 여성의 일생
  • 충청리뷰
  • 승인 2018.08.1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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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실즈 저 <스톤 다이어리>

김대선
청주독서모임 ‘질문하는 책들’ 운영자

483페이지의 두툼한 소설책 한 권이 있다. 맨 처음에 빼곡하게 들어찬 가계도가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한다. 엄연한 장편소설인데도 이야기가 좀 진행된다 싶으면 갑자기 뚝 끊어지면서 시대를 건너뛰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끝까지 다 보면 무슨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은 이야기일 뿐이다. 심지어 주인공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은 스포일러조차 되지 못한다. 이렇게 무미건조한 자서전 같은 소설에 재미와 감동이 모두 담겨 있다면 과연 어떨까? 소설 <스톤 다이어리>는 바로 그런 작품이다. 퓰리처상의 빛나는 영예는 덤이다.

이 작품과 많이 닮은 다른 소설이 하나 있다. 제목부터 비슷한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두 소설을 비교하며 읽는다면 재미가 더욱 배가된다. 두 작품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두 작품 모두 어느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생을 잔잔하게 풀어낸다. 심지어 주요 등장인물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마저도 닮았다. 소심하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한 남자가 뜻밖의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들어서 평소를 뛰어넘는 대담성으로 고백하고, 그 간절한 마음이 긍정적인 응답을 받는다는 점이 같다.

스톤 다이어리 캐럴 실즈 지음 한기찬 옮김 비채 펴냄

하지만 두 작품에는 하나의 큰 차이가 있다. <스토너>의 주인공 스토너는 그 시대의 남성을 대표할 만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러나 <스톤 다이어리>의 주인공 데이지 굿윌은 한 시대의 여성을 대표할 만한 캐릭터다. 1905년에 태어나서 거의 20세기의 끝까지 살다 죽은 그녀의 삶은 곧 20세기의 여성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출생, 결혼, 가정사, 일, 노년의 삶 등의 모든 부분이 하나하나 의미심장하다.

돌과 꽃의 상징으로 그려진 일생
나에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소개한 책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진행자 이동진 씨는 소설에 대한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장르 소설이고, ‘사건의 여파’를 다루는 것은 장르 소설이 아닌 쪽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 소설 속 사건 그 자체만 중요한 게 아니라, 사건과 그 전후 주변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는가의 문제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나 현대 미술처럼, 소설은 이야기의 내용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 형식이 중요하다. 바로 거기에 소설을 ‘작품’으로 읽는 무궁무진한 재미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주인공 데이지의 삶은 때때로 주변인들끼리 주고받는 수많은 편지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데이지의 말과 글, 생각이 전혀 표현되지 않는 부분이 길게 이어진다. 주인공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데도 그녀를 둘러싼 일상의 풍경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저자가 데이지의 관점이 아닌 주변인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사람의 삶을 기록할 때, 그 사람 자신의 말보다는 주변인의 말이 더 큰 영향을 가진다는 견해 때문이다. 둘째로는 과거의 여성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었다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과거에 그런 사회적 한계가 존재했으며, 지금까지도 충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점을 에둘러 전할 뿐이다.

이 소설은 꽃과 돌에 연관된 온갖 상징으로 가득하다. 데이지의 아버지 카일러의 직업은 석공으로, 돌로 시작해서 돌로 끝나는 인물이다. 그가 아내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쌓아 올린 돌탑은 성스럽고도 신비롭다. 후반부에 인생의 단면들이 하나하나 켜켜이 쌓여서 돌처럼 굳어진 화석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마치 사람의 인생이란 화석이나 지층과도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어머니인 머시 스톤(돌)은 데이지(꽃)를 낳았고, 스톤월(돌) 타운십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플로리다(꽃)에서 결말로 치닫는다. 만약 후에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돌과 꽃의 상징을 더 많이 발견하는 재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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