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익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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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익모초
  • 충청리뷰
  • 승인 2018.08.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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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효 진 소설가

111년만의 살인적인 폭염 속에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 같다. 머리가 띵하고 맥이 빠지고 식욕도 사라졌다. 속이 메슥메슥하다. 축 늘어진다. 더위에 지쳐 혀를 빼물고 나자빠진 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그냥 가면 후세 사람들이 내 사인을 놓고 뭐라고 수군댈까, 걱정도 됐다.

요즘엔 지인들과도 “더위 잘 견디고 있느냐?”는 말로 인사를 시작하곤 한다. 다들 내게 돈 아끼지 말고 에어컨을 빵빵 틀라고 한다. 아무리 빵빵 틀어도 전기사용료가 5만원도 안 나온다는데, 무엇을 아낄까.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에라 빵빵 틀자. 그러나 이번엔 냉방병이 문제였다. 기계가 타는 듯한 단내도 나고, 머리도 아프고, 으슬으슬 춥기도 하고, 소름도 돋고, 재채기가 났다.

어릴 적 정월 대보름 아침이면 이웃 돼지네 집으로 갔다. 돼지가 번득 보이면, “야, 돼지야!” 부르곤 대답이 나오기 전에 대뜸 “내 더위!” 하고 더위를 팔았다. 그러면 성공이다. 그해 여름 나는 더위를 먹지 않고 잘 넘길 수 있다. 만약 돼지란 놈이 먼저 눈치를 채고 낼름 “먼젓더위!” 하고 뱉어버리는 날이면 나는 망친다. 내가 더위를 팔기는커녕 되레 산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해 여름 더위를 먹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더위를 먹는 건 부스럼(종기)에 걸리는 것처럼 일생일대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정월보름이면 부스럼(부럼)과 함께 더위를 팔았다.

그땐 어느 집이건 마당가에 익모초(육모초)와 댑싸리가 곱게 자랐다. 일부러 씨를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더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엔 익모초의 잎이 무성하게 자란다. 몸이 허약했던 나는 곧잘 더위를 먹곤 했다. 불칼을 휘두르는 더위에 눌려 내 몸의 조절기능이 할 일을 포기하고 늘어져버린 것이다. 내가 헉헉거리며 축 늘어지면 할머니는 익모초 잎을 따다가 돌판에 갈아서 즙을 냈다. 할머니는 익모초즙 한 사발을 들고 와서 내 코를 쥐고 억지로 마시게 했다. 소태 같이 썼다. 그러나 그놈 한 사발을 마시고 나면 거짓말처럼 더위 먹은 증세가 사라졌다. 할머니와 익모초가 그립다.

엊그제 보도로는 올해 온열질환자가 3천 명을 훨씬 넘었고 사망자수도 40명을 넘었다고 한다. 사망자가 작년의 다섯 배나 늘어났다고 한다. 온열질환이란 더위와 고온 때문에 생기는 질환의 총칭으로 더위 먹는 것 외에 일사병, 열사병, 열경련 같은 것을 통칭한다. 땀띠도 이 중의 하나다.

이 살인적인 더위는 왜 왔을까. 사람이 편히 살기 위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 탓이다. 에어컨을 빵빵 틀면 실내공기를 차게 만든 양과 같은 양의 열이 실외를 달군다. 자동차를 타고 기름을 때는 사이, 발전을 하는 사이, 공장을 돌리는 사이, 실내 난방을 하는 사이 탄산가스가 발생하고, 지구의 숲이 그만큼 사라지고, 남극의 오존층이 뚫리고,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고, 그래서 여름엔 살인적 더위가 엄습하고, 겨울엔 살인적인 추위가 인간세상을 꽁꽁 얼린다.

결국 이 살인적인 더위를 불러들인 범인은 우리 인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파놓은 구덩이에 우리가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다. 꼴좋다! 그런데도 우린 반성하지 않고 있다. 얄팍한 머리를 요리조리 돌리면서 다른 핑계를 대고 있다. 아무래도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의 판을 바꿔야 할 것 같다. 할머니가 갈아 만든 익모초즙 한 사발 같은 특효약이 아쉽다.

요즘엔 미세먼지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밤에도 문을 있는 대로 활활 열어놓고 잔다. 지난밤엔 너무 추워서 자다 말고 일어나 문을 닫았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높다. 한낮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견딜 만하다. 가을이 내 지르는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더위야 썩 물러가라!” 가을이 오면 이 살인적인 더위가 한때의 추억이 되고 말까 걱정된다. 그러면 내년 여름엔 또 할머니와 익모초가 그리울 것이다. 아니 당장 올 겨울 동장군과 싸울 일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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