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언론은 왜 국민의 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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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언론은 왜 국민의 적인가
  • 충청리뷰
  • 승인 2018.08.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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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이낙연 국무총리가 언론을 비판했다고 해서 얘깃거리가 됐다. 그는 며칠전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정회의를 주재하던 중 이런 말을 했다. “언론은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보도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이 꼭 그렇지는 않다....오해는 실수로 하는 것이고 왜곡은 일부러 하는 것이다.”

이를 보도한 언론들은 최근 정부정책에 대한 주류언론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기자출신으로서 불편함을 토로한 것이라고 거의 똑같이 진단했다. 물론 문제의 발언이 관심을 끈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다. 현 정부의 최고 책임자급이 언론을 향해 자기 속내를 내비쳤다는 점과, 전직 동아일보 기자인 선배로서 후배 언론인에 대해 일종의 따끔한 지적을 가했을 것이라는 추론 등이다.

사실 요즘 몇몇 중앙언론 보도를 보면 정부 요인들이 열을 받고도 남을 만하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북한 비핵화와 원전 등 주요 국가 현안에 대해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것도 부족해 마치 나라에 큰 난리라도 닥칠 것처럼 위기론을 고조시킨다. 연금문제를 놓고선 현 집권세력의 무능과 무정견을 연일 맹타하며 압박한다.

그러나 이낙연 총리가 말하고자 한 것은 언론의 왜곡보도이지 언론의 숙명이랄 수 있는 ‘비판과 견제’가 아니다. 오해는 실수로 하는 것이고 왜곡은 일부러 하는 것이라고 굳이 가이드 라인까지 제시한 이유를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몇 몇 주류 언론의 최근 보도가 다분히 작위적이거나 혹은 특정 목적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웬만한 언론인이라면 충분히 인지하고도 남는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해 박근혜 탄핵 이후 숨죽이고 있던 보수언론이 다시 반격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하는 이들도 많지만 꼭 그렇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언론은 사실에 대한 천착과 접근 못지 않게 일정 부분 흥미와 자극에도 유혹을 느낀다. 보도라는 자체가 늘 대중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를 언론의 생리 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많은 나라에서 언론이 공적(公敵)이 된 현실에선 쉽지않은 문제다. 작금에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례는 이런 의제에 대한 사상 초유(?)의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

지난 16일 미국 전역의 350여개 신문사들이 ‘언론은 국민의 적’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론관을 비판하는 사설을 일제히 게재했다. 외국이나 국내에서 그동안 정부 혹은 특정 집단에 맞서 몇 몇 언론사들이 연대하는 일은 종종 있어 왔지만 이처럼 온 나라의 언론이 들고 일어선 적은 없었던 것같다. 역시 문제의 발단은 트럼프다.

트럼프와 언론의 적대관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트럼프는 기자들의 면전에서 ‘가짜뉴스’니 ‘국민의 적’이니 하며 언론을 깔아뭉개고 언론은 시정잡배 다루듯 트럼프의 모든 것을 까발리며 흠집내려 안달이다. 물론 트럼프가 주류 미디어와 전쟁을 벌이게 된 결정적 원인은 본인에게 있다. 트럼프는 취임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에 대해서는 무조건 Fake News(가짜 뉴스)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반목해 왔다. 그의 반언론관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난 그들을 소설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취재원을 거짓으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너무나 나쁘고, 너무 가짜이며, 너무 지어낸다."

그러면서 트럼프 자신은 트위터를 통해 국민들과 소통하려 한다. 그의 최대 무기는 주말엔 5000만명에 달한다는 팔로워다. 이 정도의 수치는 미국내 주류언론의 독자와 시청자수를 다 합친 것보다도 많다. 때문에 언론학계에서는 TV 네트워크와 신문 그리고 CNN같은 뉴스전문채널로 대표되는 전통적 언론시스템과, 트럼프가 구사하는 21세기형 1인 미디어의 싸움에서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가 또한 초유의 관심사가 됐다. 만약 트럼프가 이긴다면 기성 언론문화의 대변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언론에 대한 트럼프의 반감도, 트럼프에 대한 언론의 비판도 아니다. 둘 사이에 조성되는 인식의 의도성, 다시 말해 목적성이다. 자신을 비판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짜나 적으로 매도하는 트럼프, 또 이에 맞서 트럼프의 하야까지 운운하며 눈만뜨면 난도질을 해대는 언론의 자세에는 분명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언론의 비판이 아닌 언론의 왜곡을 지적하며 이낙연 총리가 예단하고 있을 사회, 국가적 몰가치의 문제다.

기자가 특정 사안을 보도하는 데엔 대략 두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팩트에 대한 완벽한 확인(fact check)과 자신감, 그리고 획득한 정보와 취재원에 대한 믿을만한 정황이다. 전자의 경우는 보도에 따른 심적부담이 덜하지만 후자는 통상 기자의 직관을 수반하게 돼 판단이 어긋나게 되면 자칫 명예훼손 등의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이낙연이 말한 실수에 의한 오해는 바로 이런 것으로 의도치 않은 오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이 정도의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안 그러면 언론의 제1 소명인 비판과 견제의 기능은 연성화를 피할 수 없게 되고 끝내는 기성질서에 순치되고 만다. 언론선진국이 다르다는 점은 바로 의도되지 않은 이같은 오해에 대해선 사회적 포용을 중시한다는 것인데 1964년 ‘설리법 판결’을 계기로 거의 완벽하다할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이 대표적이다. 특히 공인에 대해서는 ‘사실상의 악의’(actual malice)를 가지고 보도했다는 것을 피해자 스스로가 입증하지 못하면 미국에서 언론은 무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실정법의 잣대를 그대로 언론에 적용하는 바람에 언론자유가 여전히 위축되거나 제한되어 있다. 만약 정보와 취재원에 대한 믿을만한 정황 그리고 기자의 직관에 의해 보도하는 언론행위가 없었다면 우연하게 접한 쪽지 하나로 전모가 드러난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사건이나 태블릿PC 하나로 정권까지 교체케 한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은 아직까지도 묻혀졌을 지도 모른다. 결국엔 기자의 용기와 판단의 문제인 것이다.

언론을 국민의 적으로 만든 트럼프가 만약 언론의 견제가 없었다면 지금쯤 그는 세계의 적이 되었을 것이다. 천방지축 럭비공 같은 트럼프로선 지금처럼 언론과 싸워야 국가 리더로서 그나마 제대로 된 방향성을 견지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언론의 의도성이다.

최근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사실상의 악의’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왜곡하는’ 보도가 늘어나고 있다. “너 맘에 안들면 죽여!” 식의 다분히 의도성 기사가 보수언론에 남발되는 것이다. 이 것의 몰가치는 결국 국민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분탕질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꼭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언론은 국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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