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자식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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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자식이라는 것
  • 충청리뷰
  • 승인 2018.08.3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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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옥천에서 빚에 시달리던 40대 가장이 부인과 세 딸을 살해하는 끔직한 사건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한 살 터울로 이제 겨우 여덟, 아홉, 열 살이라고 한다. 사회를 고민하고 이해하기는커녕 그저 마냥 뛰어노는 것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그들의 죽음이 참으로 허망할 뿐이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늘 엄습하는 감정이지만 인간에게만존재한다는 ‘이성’이라는 것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오히려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내가 낳은 자식 내가 데리고 가겠다는 가부장적 소유의식 때문이라고 진단하지만 쉽게 수긍할 수가 없다.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라고 확신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天倫)이라고 한다. 하늘의 인연으로 맺어진만큼 서로가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 또한 지극하다 할 수 있다. 이 것이 가족의 공동운명체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지며 가족간 연대의식이 강조되는 건 바람직하겠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인 책임감까지를 다 합리화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가족관계 또한 책임감을 앞세우려면 그 전에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게 중요할 것이다. 자식에게 불행과 빈곤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절박함을 체화하기 전에 가장으로서 자신의 역할부터 자책하고 자녀들의 인격적 존재 이유를 조금이라도 고민했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안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곧추세우는 생각이지만 부모와 자식간은 어쩔 수없이 부모의 헌신과 양보, 배려가 선행돼야 탈이 없는 것같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요즘은 자식을 대하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을 받고도 남을만한 사회분위기다. 대화단절은 기본이고 도대체 개념이 없는 밥상머리 예의에다 웃 어른을 좀처럼 의식하지 않는 행동들이 모두 그렇다. 기성세대의 입장에선 아무리 잔소리를 해대도 스마트폰과 디지털로 자란 자녀들을 설득하고 계몽(?)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그러다가 간혹 의견이라도 충돌하고 다툼을 하게 되면 이를 푸는 것도 부모의 책임으로 먼저 주어진다. 인간생태학을 30여년간 연구해온 미국 코넬대학교 칼 필레머 교수가 1000명이 넘는 70세 이상 노인들을 인터뷰해 내놓은 책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에 이런 조언이 있다. 노인들이 평생을 살며 깨우쳐 온 삶의 지혜를 집대성한 것이라서 매우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자녀와 불화가 생겼을 때 화해가 필요한 쪽은 부모다”란 것이다. 자녀는 부모와 다툼이 생겨도 말 한마디 않고 잘 지낼 수 있지만 부모는 안 그렇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부모가 잔뜩 화가 나서 자녀에게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쳐 놓고도 먼저 후회하고 안절부절하는 쪽은 부모다. 자식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을 때조차 오히려 그 자녀가 궁금하고 걱정돼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든 게 부모 마음이다. 부모의 상실감은 자녀가 느낄 그 것보다 몇 갑절이 크다. 그러니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게 좋다는 ‘지혜’를 노인 1000명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얘기는 이래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딸 아이가 갑자기 독립을 선언했다. 자신의 예금으로 원룸을 계약하고 가구를 마련하는 걸 보니 제딴에는 오랫동안 차근차근 준비한 듯싶다. 대학졸업 후 직장생활도 탈없이 하던 터라 좋은 남자 만나 늦지 않게 결혼하기를 은근히 바랐건만 예상치않게 부모와의 전략적 별리를 통보한 것이다.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어 응해주었지만 곧바로 온갖 고민과 걱정들이 교차한다. 이사 가게 될 동네는 깨끗한 지, 건물은 법적인 문제가 없는 지, 큰 도로와 가까운지, 출입문 잠금장치는 제대로 갖춰져 있는 지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가 미덥지 못하다. 이 것 저 것 캐물어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나도 어른이야!”다. 딸이 최고라며 아버지로서의 정을 다 주고 싶었던 아이이기에 그 대찬 말이 야속하기 그지없지만 “너도 나중에 부모가 되어봐라”란 말만 되뇌일 뿐이다. 대견함을 격려해 주고 싶어도 지금보다도 더 노심초사해야할 것같은 생각만 넘쳐난다.

여기 서른 여섯 살의 전도양양한 젊은 의사가 있다. 그동안의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최고의사로 꼽히며 유명대학들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는 등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즈음, 그는 돌연 시한부 폐암선고를 받는다. 힘든 투병생활 중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던 그는 2년동안 뉴욕타임즈와 스탠퍼드메디슨이라는 신문에 각 각 ‘시간은 얼마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와 ‘떠나기 전에’(Before I Go)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기고했다. 자신의 투병과정과 삶에 대한 애착을 얼마나 절절하게 전했던지 독자들의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는 끝내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단행본으로 나온 소설 <숨결이 바람될 때>(영어명 When Breath Becomes)는 사후에 이 글들을 모은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돼 많은 이들을 울렸다. 이 책의 끝부분에 의사 아버지가 죽기 전 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한다.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부모에게 자식이라는 것, 이를 어찌 세태의 계량으로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을 안 듣는다고, 가정이 빚에 쪼들린다고 해서 자식을 부모잣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 자식은 부모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희망과 용기를 얻지만 부모는 자식의 아주 자잘한 관심에조차 감동을 받는다. 바로 이런 것들이 가정의 안녕을 지켜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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