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그라스 낀 임종석
상태바
선그라스 낀 임종석
  • 충청리뷰
  • 승인 2018.10.31 1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덕현 발행인

역시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말발은 노벨상 감이다. 정치판으로 슬그머니 돌아온 손학규를 향해 임종석이 ‘꽃할배’라고 깐죽대는(?) 순간 사람들은 노회한 손학규의 뒷치기를 일찌감치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그라스를 끼고 전방시찰에 나선 임종석에게 손학규는 “국민들은 또 하나의 차지철과 최순실을 보고싶지 않다”며 기가막힌 적시타를 날렸다.

한데 참 묘하게도 임종석이 국방·통일부장관과 국가정보원장등을 대동하고 남북 유해발굴이 한창인 미무장지대에서 찍은 사진은 5.16쿠데타의 상징처럼 각인된 박정희-차지철의 사진과 비교돼 많은 것을 연상시킨다. 우선 그들이 군복을 입고 전방을 주시하는 모습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떠올리고도 남았다.

어쨌든 문제의 사진을 접한 사람들은 손학규의 순발력에 잠시 헛웃음을 짓다가도 한편으론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비서실장의 이미지와는 잘 안 어울리는 당시의 모습에서 숱한 ‘스토리’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청와대의 해명처럼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 자격으로 전방순시를 했다손 치더라도 사진 속의 풍채는 어쨌든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해 범인들이 갖는 상식과는 거리감이 컸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오랜 핍박을 받던 임종석이 화려하게 정치무대에 등장하던 초창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청주강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참석자들 대부분은 그 혹독하던 공안시절에도 전대협을 이끌며 신출귀몰하던 그를 직접 보고 싶은 호기심을 앞세웠다. 그러면서 당시는 지금보다도 훨씬 젊었을 때라 수려한 외모에다 달변인 그를 ‘차세대 리더’감으로 주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손학규가 지적한 대로 임종석은 이미 자기정치를 하고 있고 할 수밖에 없다. 시쳇말로 문재인 정권의 황태자로 입지를 분명히 다졌을 뿐만 아니라 꼭 그 게 아니더라도 운동권의 핵심을 거쳐 16, 17대 국회의원과 서울시정무부시장 등의 이력으로 가미된 정치적 투쟁력 자체가 임종석을 일찌감치 차세대 주자로 부상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이 매년 연중계획으로 발표하는 ‘차세대 리더’에서도 그는 올해 정치부문 3위에 올랐다. 1위 김경수와 2위 이재명이 검경의 포토라인에 서는 시기에 이번 선그라스 정쟁이 벌어진 것도 흥미롭다.

그의 최전방 행보에 대해 숱한 논란이 일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이미지 업에 엄청난 홍보효과를 거둔 셈이 됐다. 게다가 방한한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대통령 면담 전에 만나 대담하는 모습이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림으로써 그는 선그라스 공방속에서도 되레 정치적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비서실장 임종석은 어차피 시기만 남았지 조만간 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정치적 야망을 가진 사람이 비서직을 오래 차고 있다가는 자칫 역풍을 맞게 된다. 원론적인 얘기이지만 비서라는 자리는 조력자역할에 머물러야지 지금처럼 주인행세를 하다가는 반드시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비서를 뜻하는 시크리터리(secretary)의 1차적 어원인 라틴어 세체르네레(secernere)가 ‘분리’ 혹은 ‘구별’의 의미를 띠는 것을 봐도 비서는 주군과의 관계에서 그 경계를 뛰어넘었다가는 큰 코를 다치게 된다. 국가의전서열 17위의 막강한 자리일망정 대통령이나 여론의 눈밖에 나면 한 방에 갈 수 있는 것이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다.

지금도 DJ의 영원한 비서로 통하는 박지원은 “대통령비서실장은 정치인이 아니다. 비서는 오직 비서일 뿐이다”고 충고한 적이 있다. 박지원은 DJ 퇴임후 감옥을 다녀온 후로도 이런 말을 남겼다 “정권이 끝나면 저처럼 불행한 사람이 나와서는 안된다. 순간은 막을 수 있지만 영원은 막을 수 없다.” 권력의 흥망성쇠를 경고한 것으로 잘 나갈 때 처신에 유의하라는 것 쯤으로 해석된다.

임종석이 차세대 주자로서 자기정치를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청와대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손학규의 일침은 임종석에게 되레 약이 될 수 있다. 현 정부의 실세를 향한 공격이 이번처럼 공개적으로 여론화되는 작금의 상황이 역으로 전화위복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지난 지방선거에서 전남지사 출마설에 휘말렸던 그로선 장관 입각이나 2년후 총선 출마 등 변신을 위한 여러 경우의 수를 앞에 두고 있다.

임종석의 향후 거취는 충북에도 민감하게 작용한다. 노영민 중국대사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여의도 증권가의 이른바 ‘찌라시 언론’에선 이미 임종석 후임으로 노영민을 지목한 지 오래다. 사드갈등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일 때 부임한 노 대사는 최근 양국관계가 다시 정상화로 치달으면서 국내 복귀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이 노 대사를 가장 신임하는 정치적 동반자로 공언한 것을 감안하면 복귀를 하더라도 중책을 맡을 공산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이번 임종석의 선그라스 파문은 공교롭게도 차기 대권의 역학관계를 가시권으로 들여오게 한 돌발변수가 됐다. 역대 정부를 보더라도 2년 차 중반인 이 시점은 늘 잠룡들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하면서 당대의 정권 역시 본격적인 부침으로 돌입하게 된다. 물론 정권의 입장에선 강력한 후계자가 나타나야 여론에 덜 휘둘린다. 레임덕이 덜 하다는 것이다.

이게 아니고 대통령이 혼자 독주하며 모든 것을 만기친람할 경우 정권이 튼튼할 것같지만 아니다. 오히려 민심에 취약하게 된다. 박근혜가 이 시기에 세월호 참사를 만나 이같은 정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권좌에서 쫓겨난 사례는 좋은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임종석의 최근 행보를 놓고 제기되는 ‘청와대의 후계자관리가 이미 시작됐다’는 일부 지적은 새겨들을만 하다.

때문에 임종석의 선그라스엔 현 문재인 정권의 운명이 잔영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그 것이 통일시대를 이끌며 한반도에 신세기를 가져오는 역사적인 업적일 수도 있고, 지금 자유한국당의 주장처럼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를 걱정한다면 임종석은 하루라도 빨리 청와대를 나와 더 자기정치를 할 필요가 있다. 대권은 자기만의 투쟁이 없이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