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귀 기울이는 사회
상태바
고통에 귀 기울이는 사회
  • 충청리뷰
  • 승인 2019.01.04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 승 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2019년 1월 1일은 홍기탁, 박준호 두 명의 파인택 노동자들이 서울시 목동 열병합발전소의 75m 굴뚝에 오른 지 416일째이다. 이미 세계 최장기 굴뚝농성이다. 2015년의 408일 고공농성에 이어 2017년 11월 12일에 또다시 굴뚝을 오르면서 이들이 내건 요구는 공장 정상화와 단체협약 이행이었다. 이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회사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마찬가지로 1월 1일은 제주도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김경배 씨의 단식이 14일차를 맞이한 날이다. 앞서 2017년 10월과 11월에도 김경배씨는 제주 제2공항 건설 사전타당성조사 재검토를 요구하며 42일간 천막단식농성을 했다. 김경배 씨가 다시 단식을 하며 내건 요구는 국토교통부와 제주도청이 급하게 마무리 지으려는 타당성재조사 검토위원회의 재개와 공론화이다. 김경배 씨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강추위 속 굴뚝과 천막에서 이들이 겪는 고통을 우리가 느낄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직시하고 있을까?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라도 듣고 있을까? 왜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할 정부와 기업은 약속을 어기고 개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요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왜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하냐고 묻는다면 지켜져야 할 사회의 합의가 지켜지고 있지 않아서라고 답하고 싶다. 언제나 이런 일은 개인의 잘못과는 상관이 없다. 한국합섬에서 스타케미칼, 파인텍으로의 변화가 일하는 노동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김경배씨가 제2공항 예정지인 성산읍 난산리에 사는 게 그의 잘못이 아니듯 말이다. 이런 문제가 내가 일하는 직장, 내가 살고 있는 동네로 전이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그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 아니다. 그 고통은 타인의 삶으로 드러난 위기의 징후이다.

절망에 내몰린 사람의 자살을 사회적인 타살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외에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업과 정부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호소할 곳은 어디일까? 동료 시민들마저 그들의 목소리를 불편하다고 배제한다면 어디도 갈 곳이 없다. 자살하려는 사람에 주목하지 않은 사람이 방관자라면, 타살을 방치한 사람은 공범이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변호할 수 있지만 바로 그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사회적인 타살의 정황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한국의 사회신뢰도는 이미 바닥이다. 정부기관에 대한 신뢰는 10~20%대이고, 기업에 대한 신뢰도 30% 밑이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에 대한 불신은 타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미 신뢰가 무너진 한국 사회,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건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요구는 더욱더 고통스럽고 더 비극적인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당연히 그 길을 갈 사람들도 줄어든다. 이대로라면 한국 사회는 거대한 무덤이 될지 모른다.

개인에 대한 신뢰는 믿음으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믿음이 아니라 권력감시와 민주적인 통제로만 회복될 수 있다. 기업에 대한 신뢰 역시 믿음이 아니라 기업감시와 합리적인 개입으로만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와 기업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믿어달라는 말은 불신만 부추긴다.

개인이 아닌 정부와 기업에 의한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2019년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득권정치를 무너뜨릴 연동형 비례대표제도로의 선거제도 개혁과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책임을 무겁게 묻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다. 그리고 이런 제도 변화와 법개정이 한국 사회를 서서히 복원하려면 혼자서는 어찌할 수 없어 터져 나오는 고통에 계속 주목해야 한다.

고통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고통에 귀 기울이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적폐청산은 소수의 결단이 아니라 사회적인 고통을 하나씩 줄여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