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과 노영민
상태바
문재인과 노영민
  • 충청리뷰
  • 승인 2019.01.16 1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덕현 발행인

노영민이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자 지역언론들이 앞다퉈 기대감을 쏟아냈다. 각종 지역현안에 청신호가 켜졌고 향후 중앙무대에서 충북의 정치력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사석에선 만사형통을 빗대어 ‘영민형통’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보도는 앞으로 자제됐으면 한다. 본인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반가운 일이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정의 최고 중책을 맡게 됐으니 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는 국가의전서열 17위 이지만 역대 전임자들의 영욕과 부침 때문에도 국민들의 인식속에선 그 이상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가에선 청와대 비서실장을 국무총리, 국정원장과 함께 권력의 3대 축으로 보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영민 비서실장을 임명하면서 두 가지를 특별히 강조했다. 친문이 아니고 정무적 기능을 강화했다는 것, 앞으로 활동하면서 상공인들을 두루 만날 것 등이다. 실제 노영민은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지만 원조 친문이 아닌 둘의 인간적 신뢰로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고, 대학에선 경영학을 전공한데다 지난 국회에선 산업통산자원위원장을 맡는 등 주로 경제통으로 활동했기에 국내 경제, 산업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밝다. 최근 난관에 처한 국가경제를 고민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카드는 없다.

하지만 노영민 실장의 취임 일성은 한마디로 “비서는 비서일 뿐이다”로 정리된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만나 어떤 얘기라도 다 듣고 경청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노 실장은 전임자에 비해 언론에 자주 노출되지도 않는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노영민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여론화된 것과는 좀 더 다른 차원에서 향후 역할을 기대한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완벽한 신뢰관계라는 점을 들어 누구보다도 대통령에 대해 진언을 넘어 설득까지 할 수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경제통일뿐더러 스스로가 직접 전기사업장을 일궜던 경험으로 인해 시장과 실물경제에 능통한 DNA가 앞으로 정책판단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와는 차별화된 유연성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문 대통령이 고민스러울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노 실장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둘 사이는 그야말로 ‘케미(chemi)’가 일치하는 관계다. 양육강식의 정치판에서 화학적인 일체감까지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념과 논리는 물론이고 정서적으로도 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노 실장은 이제까지의 대통령과 비서실장 관계를 뛰어넘는 완벽한 믿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소지가 크다. 주군에게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파멸당하는 비서가 아니라 그 주군을 마지막까지 진정성있게 설득할 수 있는 비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만이 비로소 대통령에 대해 “아니올시다!”도 가능해진다.

그 첫 번째 역할이 인사와 경제정책에서 빛을 발할 지도 모른다. 자유한국당의 어깃장처럼 청와대와 각료들의 인사 및 경제정책에 있어 좌파의 이념적 편향성이 의심된다면 이런 경향을 완화하거나 충격을 줄이는 역할이 노 실장의 몫이 될 것이다. 여론의 거센 압박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자신의 브랜드인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을 재천명했다. 이와 관련해서도 속도조절과 시간적 유예가 필요하다면 앞으로 노 실장이 문 대통령을 마지막까지 이해시키고 설득할 문제다.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원초적인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직관리론에선 비서의 경쟁력이 CEO의 경쟁력이라고까지 한다. 실제로 실패한 역대 정권을 보면 거기엔 반드시 실패한 대통령 비서가 있다. 박근혜의 김기춘만 보더라도 그렇다. 현대 사회에서 비서는 과연 어떤 이미지로 부각되는 지를 살펴보는 것도 노영민 비서실장의 향후 역할과 위상을 점쳐보는 좋은 소재가 될 듯싶다.

분명한 것은 이제 비서는 과거처럼 단순히 주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가방모찌’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에서 CEO를 보필하는 비서는 그 스스로가 종합적인 경영과 관리능력을 보이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최고 경영자의 옆에서 조직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그 것을 주군을 통해 경쟁력과 생산성으로 연결짓는 것도 비서의 몫이다. 주군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를 챙겨야 하는 비서는 업무능력 못지 않게 정무적 판단도 뛰어나야 비로소 그 정체성을 인정받는다. 국내와는 달리 외국의 대기업들은 CEO 비서를 공개채용하는 게 관례다. 최고로 적합한 능력자를 뽑기 위해서다.

얼마전 특단의 구조조정을 발표해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와 재선가도 즉 ‘빅 피처(Big picture· 큰 그림)’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 유명세를 탄 GM의 최고경영자 메리 배라(Mary Bara)도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CEO의 수석비서를 거치며 경영 전반을 익힌 게 오늘날 입지의 결정적 근거가 됐다. 산업계에서도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자동차업계의 최고 반열에 올라 침몰하던 GM을 구하고 있다.

능력보다도 충성도를 중시하는 국내 대기업들 역시 CEO의 비서만큼은 남다른 잣대로 처우한다. 삼성, 현대, 기아차 등의 계열사 사장은 비서출신들이 다수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삼성의 경우 한 때 50%에 가까운 계열사 사장이 비서출신이라는 연구보고서까지 있었다. <비서처럼 하라>(조관일 저)와 <비서처럼 일하라>(이준의 저)가 성공학의 대표적 서적으로 꼽히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 문재인과 비서실장 노영민의 관계설정은 더 더욱 분명해졌다. 우선 노 실장은 사드분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일 때 대사를 맡아 다시 정상화라는 업적을 만들어낸 만큼 앞으로는 그 문제의식과 통찰력으로 대통령과 동반자적 의사소통을 하라는 것이다. 상공인들만 만날 게 아니라 본인이 말한대로 이념과 생각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이를 대통령에게 가감없이 전달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보다도 그를 믿는 대통령은 귀를 열고 들어줄 것이다.

세상 어떠한 대화도 상호 공감의 신리가 없이는 언제든지 불편해질 수 있다. 그 믿음을 흔히 래포(rapport)라고 한다. 문재인-노영민은 바로 이런 것이 가능하고 둘을 바라보는 국민들도 이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최고 참모로서 용기있게 고언과 진언을 하라고 하지만 현실에선 쉽지 않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 또 다시 나라가 가장 힘들 때 청와대에 들어온 비서실장 노영민의 숙명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이렇게 될 때만이 노영민의 미래상 ‘빅 피처’는 자연스럽게 그려질 것이다.

300여명의 어린학생들이 탄 세월호가 물에 잠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대통령 처소의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비서실장은 더 이상 필요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