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 잘 놀려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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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 잘 놀려 살아남기
  • 충청리뷰
  • 승인 2019.01.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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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근 변호사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세상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일 게다. 우리 감각기관은 스스로 필요를 느낄 때 그 기능을 다하려고 한다. 자연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이 기능은 극대화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필요를 돈과 기술이 대신해 준다면, 감각기관은 퇴보하고, 우리 삶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집엔 침대가 없었다. 신혼 때 있기는 했으나, 이사 다니다 버리고는 다시 사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하나 생겼다. 아들 방에. ‘산 것’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녀석과는 산에 같이 가고, 가끔은 영어나 사회 공부, 텃밭농사도 같이 하면서 교감을 나눠왔다. 그 교감의 연장선에서 녀석에게 침대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반신반의했다.

건재상에서 10만원 조금 더 들여 재료를 샀다. 재료는 주변에서 흔한 낙엽송을 켠 것이다. 나무로 뭔가를 만들려면 설계와 치목이 중요하다. 전에 시골집에서 생태뒷간을 지을 때도 이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였다. 설계는 빈 종이에 펜으로 침대를 위, 앞, 뒤, 좌우 옆에서 본 것을 대강 그리고, 치수를 적는 것이다. 목재를 다듬고 손질하는 치목에서는 치수를 잘 재고 그 치수에 따라 정확히 자르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대부분 전기톱을 사용해 오류를 줄이지만, 난 손톱을 사용하다 보니 자른 면이 매끄럽지 못하다. 또 손톱질은 상당한 체력을 요구해 중간에 지칠 때가 많다. 이 작업을 한밤중에 시골집 헛간에서 불을 켜고 했다. 톱으로 자른 부분은 사포질로 다듬었다. 아들 녀석이 가끔씩 나와 일의 진행을 살펴보는데, 그렇게 해서 정말로 침대가 만들어질까 여전히 다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치목을 마친 목재를 차에 싣고 청주 아파트로 와 침대가 들어갈 방으로 날랐다. 생각보다 목재 양이 많았다. 가장 긴 것이 210cm라 엘리베이터로 옮기는 작업도 혼자라면 어려울 텐데, 아들과 둘이서 하니 재미있고 쉬웠다.

드디어 조립이다. 아파트라 조심스러웠다. 맨 윗부분 사각의 틀을 조립하니, 한 쪽이 떴다. 나무의 뒤틀림 때문인지 내가 못질을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내가 와 들여다보고는 왜 그러냐며 잔뜩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난 나중에 다 조립하면 가라앉을 거라 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속으로는 걱정되었다.

그 틀 안으로 상판을 받칠 막대를 가로지르고 네 귀퉁이에 다리를 박았다. 한 쪽이 뜨는 것은 여전했다. 옆에서 나를 도와주는 아들도 그게 계속 걱정이었다. 중간 부분에 다리를 네 개 더 박고 상판을 얹었다. 신기하게도 상판을 얹으니, 그렇게 걱정스러웠던 한 쪽 부분이 가라앉았다. 아들도 나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리에 가로막대를 대주는 것으로 조립을 마치고 청소까지 마친 다음, 토치를 이용해 그을리면서 무늬를 내주니 아들의 입이 환해졌다. 산 것만큼 깔끔하지 못하고 투박하더라도 우리가 만든 침대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과 나의 정성과 교감이 담겨 있다. 그냥 돈을 주고 사고 말았다면 침대를 만들자는 생각을 냈을 때부터 다 만들 때까지의 고민과 수고로움, 아쉬움, 기쁨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게 진짜 살아있는 것 아닐까.

현대문명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필요한 것들은 내 손발이 아니라 돈이 다 대신한다. 의식주뿐만 아니라 아이들 돌잔치가 그렇고, 아이들 공부도 돈(학원)이 한다. 그렇게 돈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우린 돈에 더 의존하고, 감각기관은 무뎌지고, 자연스러움은 옅어져간다. 당연히 나만의 고유한 목소리도 잦아든다. 그게 바로 자본의 지배, 기술의 지배다. 오늘날 ‘위대한 현대문명’ 속에서, 부지런히 손발을 놀리는 것은 그런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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