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민주주의, 그리고 지속가능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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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민주주의, 그리고 지속가능사회
  • 충청리뷰
  • 승인 2019.03.0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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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모 전 청주대 총장의 ‘경제산책’에 대한 반박문
신동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탈핵에너지위원장

1월 14일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원전계 신년인사회에 가서 신한울 3, 4호기 재개 및 탈원전정책 속도조절을 말하였다. 그러자 야당들도 이에 가세하여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를 통해 합의된 탈원전정책기조를 뒤집으려 하고 있다. 2월 15일자 충청리뷰에도 황신모 전 청주대 총장의 탈핵에 대한 문제제기 글이 실렸다.

현재 원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친환경적인 발전원이나 기술, 산업, 경제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한 것들은 2017년 공론화위원회 자료에 보면 잘 정리되어 있다.

(http://www.sgr56.go.kr). 공론화 결론을 뒤집으려는 탈원전 논쟁은 민주주의와 생명과 정의에 대한 문제제기다.

시민들 직접민주주의 場 경험
2017년 7월부터 100여일에 걸쳐 건국 최초로 공론화위원회를 꾸려 활동하였으며 471명의 시민들이 교육을 받고 2박 3일 동안 ‘신고리 5, 6호기 건설 여부’라는 정부 정책에 대해 직접 논의한 것은 처음이다. 시민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주체로 직접 참여하여 서로의 주장을 듣고 토론하여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장을 경험하였다. 찬반투표와 대의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전부로 알았던 지난 60여년 간의 세월을 처음으로 뛰어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 결론은 서로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론화 이후 우리는 그 결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결론을 뒤집는 순간 그것은 우리가 그간 어렵게 쌓아온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절차적 민주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 같지만, 이것 없이는 실질적 민주주의와 정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라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듣고 설득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서로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신고리 5, 6호 공론화는 이 악순환 고리를 끊는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본지 2월 15일자 황신모 전 총장의 기고 ‘탈원전정책 논쟁은 계속돼야’

또한 이 공론화의 결론은 민주주의의 복구라고 할 수 있다. 원전의 출발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최초의 원전은 1971년에 ‘국가경제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군사독재정권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사항이었다. 거기에 전문가들이나 시민의 논의는 고사하고 의사표현조차도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시민들은 원전에 대해서 40여년 동안 배제되어 왔다. 비로소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폭발을 계기로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구성되어 시민의 대표가 원전에 접근할 수 있었고, 2017년 공론화를 통해 정책결정과정에 시민이 주권자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는 전문성 부족이라는 이유로 정보로부터 차단되고 결정과정으로부터 배제되어 온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었고, 헌법이 부여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원전은 정의롭지 않은 기술
원전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최고 수준의 한국 원전기술 그 모두를 백 보 양보해 원전 측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안전성과 정의에 관한 것이다. 원전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사고확률이 아주 희박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위험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사고위험성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냐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범주의 오류로 비교가 잘못된 것이다. 비행기 사고도 나서는 안 되지만 비행기 사고 영향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적이다. 그러나 원전사고는 이와 다르다. 쓰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고가 치명적인 위험과 부정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10만 년이란 인간의 상상과 능력을 뛰어넘는 시간 동안 관리해야 하는 사용후 핵연료(핵폐기물)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책도 기술도 없다. 그런데도 확률이 희박하다는 소리만 하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위험 때문에 정의문제가 제기된다. 이렇게 위험한 것을 경제와 최고수준의 기술이라는 명분 아래 외국에 수출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비단 이것은 수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내에서도 원전이 발생시키는 위험은 공평하지 않다.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원전지역 주민과 그 편리만을 누리는 원격지 도시소비자, 원전 안에서 일하는 직원과 원전 바깥 시민, 원전 안의 위험한 작업장과 상대적으로 안전한 사무실 간의 차별이 상존하는 것이 원전이다. 그래서 원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기술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관리 불가능한 원전의 근원적 위험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0위에 달한다. 그간 국민들이 다른 부문의 사회적 가치들을 희생하고 그것을 감수하면서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잃은 것도 많다. 이제 그것을 돌아보고 그간 잃었던 정치, 사회, 문화적 가치들을 회복하고 여타부문들의 실질적 민주주의와 정의를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에너지부문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이 편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겠지만, 기술발전과 사회구조, 의식변화를 통해 효율이 높아지고 있기에 더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편익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도 정의로워야 할 것이다. 나의 행복과 편리가 ‘밀양의 눈물’과 ‘김용균씨의 죽음’ 위에서 누려지는 것이라면 나는 행복하고 편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청리뷰는 특정 기고문에 대한 다른 의견도 이슈의 공론화 차원에서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신동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탈핵에너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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