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충북 3·1만세운동 발발, 기념관은 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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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충북 3·1만세운동 발발, 기념관은 無
  • 김천수 기자
  • 승인 2019.03.0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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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현장서 모자 총살, 최근 알려져 유공자 신청

충북 진천이 충북에서 최초로 3.1만세운동을 벌인 것으로 공식 확인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충북도 및 충북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도민위원회가 주최한 ‘100년의 함성 이어받아 강호대륙으로!’라는 종합학술대회의 자료에서 충북 최초의 3.1운동 현황으로 소개됐다.

이날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충북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 발표 자료에서 충북 3.1운동의 전개와 특징을 논하면서 ‘일자별 충북 3.1운동의 전개 현황표’를 공개하고 이를 설명했다.

표 최상위에 ‘진천군 진천면에서 3월 15일 50∼250명의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실시’ 했음을 밝혔다.

애국지사 윤병한 기념비가 진천군 광혜원면 산속 윤씨 종중묘원 내에 세워져 있다.

설명에서 김 수석연구위원은 “이상직의 집에서 3월 14일 모의한 만세시위계획은 다음날 새벽에 발각되어 실패했지만, 예수교 전도부인들이 주변 마을에 알려 3월 15일 돌고산, 걸미산 등에서 횃불(봉화)을 올려 만세시위를 하였다고 한다”면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3권의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아울러 국사편찬위원회(국편) 데이터베이스(DB)에 있는 <일본외무성 기록>을 언급하고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3월 15일 분명히 진천에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며 “진천읍내 주민들의 산위 횃불시위는 사실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 다음에 일어난 만세시위는 3월 19일 괴산 장날이었다”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한 첫 사례”라고 적었다.

봉화로 독립운동 서막
그러나 국편 3.1운동 DB를 보면 이미 3월 9일 진천지역으로 독립선언서가 보내졌다.

DB 기록에 따르면 3월 7,8일경 청주군 북이면 화상리 최봉길 집에 김교환이 경성(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각 1통을 휴대하고 도착했다. 다음날인 9일 그는 최봉길에게 선언서와 경고문을 보이며 ‘진천 교도는 이를 알지 못 한다. 이를 진천 교도들에게 보내야 한다’며 부탁했다. 이에 최봉길은 최원순에게 선언서와 경고문을 진천군 진천면 읍내리 김동한에게 보내도록 했다. 이 독립선언서 배포 활동으로 김교환은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DB에는 판결문 내용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한중앙연구원이 간행하는 <향토문화전자대전>에도 14일 저녁 문명학교(현 상산초등학교)를 세워 배일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해 오던 이상설의 종형제 이상직(李相稷) 등이 비밀리에 자택 객실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협의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15일 정오를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자 예수교(감리교·성공회)의 전도 부인들이 당일 각 마을 앞뒷산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계몽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록을 종합하면 진천에서 3월 15일 밤 발발된 횃불독립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 내용을 사전에 파악한 뒤 이를 집단적으로 알리기 위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국편 DB에 따르면 특히 이날 낮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은 진천헌병분대 헌병들의 사전 탐지로 무산되고 학생 22명이 체포됐다. 이 중 14명은 보안법으로 기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만세운동에 진천지역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4월 2일과 3일에는 진천군 백곡면 석현시장, 이월면 장양리, 만승면(현재 광혜원면) 광혜원리 등에서 격렬하고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펼쳐져 일본 헌병대 및 수비대와 맞섰다.

특히 만승면(현재 광혜원면)에서는 더욱 치열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윤병한은 정운화, 남계홍, 백선옥, 이영호 등과 같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군중 1000여명을 이끌고 만승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 운동을 지휘했다. 만승면 직원들은 점거에 대비해 중요 서류를 진천군청으로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헌병과 주둔 수비병들은 실탄을 발포해 현장에서 4명이 사망, 수명이 부상하고 윤병한 등 6명이 옥고를 치르게 됐다.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사람도 10여명에 달한다.

최근에서야 밝혀지고 있는 것은 현장에서 모자(母子)가 함께 총격에 의해 사살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에 대한 증언이 나오고 1974년도 진천군지 기록도 있어 최근 유족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접수한 상태다.

지난달 13일 박도철(이명 박치선) 열사의 손자 박영섭씨는 공적조사서, 독립운동가 평생이력서와 함께 8점의 증거자료를 첨부해 신청서를 제출해 오는 11월쯤 나올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3.1운동기념 시설 절실
진천군지에 ‘광혜원리에 사는 박치선이라는 사람이 현장에서 즉사하니 그 모친이 달려들어 아들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이놈들 내아들이 무슨죄가 있느냐”고 울부짖다, 왜적은 그마저 쏘아죽이니 모자가 같은자리에 쓰러져 유혈이 낭자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런 기록들이 다수 존재함에도 진천지역이 3.1만세운동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기리고 알리는 데는 소극적이라는 평가다.

수소문 끝에 기자가 찾아낸 진천지역 3.1운동기념 관련 시설은 광혜원에 있는 ‘애국지사 윤병한선생 공적기념비’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자물쇠로 잠겨진 철책 속에 있는 윤씨 종중 납골묘지에 위치해 일반 군민들은 접근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기념비에는 윤 선생의 생애 및 독립운동 족적을 기리는 내용과 함께 건립추진위원회가 1984년 12월 11일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진천향토사연구회 정제우 회장은 “진천지역은 동학 활동이 활발해 만세운동도 다른 곳보다 먼저 시작된 것같다”면서 “관련 사적지는 많은데 기념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면서 안타까워 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그는 “100주년을 맞아 도로명도 짓고 기념관 등 시설을 만들어 군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김양식 연구위원이 밝힌 자료를 보면 진천군 내 3.1운동 사적지는 7곳으로 도내에서 네 번째로 많다. 그러나 관련 현충시설은 한 곳도 없고 지역의 독립유공자도 7명에 불과해 적극적인 발굴이 절실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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