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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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의 의미
  • 충청리뷰
  • 승인 2019.03.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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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약 보름간의 외유에서 돌아와 가장 많이 접한 국가적 이슈를 꼽아봤더니 크게 세 가지였다.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건이다. 정치도 아니고 경제도 아닌 건드려봤자 구역질만 나는 성추문들이다. 미투의 세계적 추세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고작 이같은 왜곡된 성문제로 시끄럽다고 생각하니 그 착잡함이 대책없이 밀려왔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나서 엄정한 수사를 주문할만큼 어쨌든 이들 문제는 앞으로도 우리나라를 견인할 주요 어젠다(?)가 될 게 분명해 보인다. 때문에 성에 대해, 이성에 대해 우리는 왜? 이토록 당당하고 떳떳하지 못할까를 되뇌이게 된다.

-지난 1월 6일 있었던 영화 골든글로부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글렌 클로즈의 수상소감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당시의 동영상을 틈만 나면 재생해보는데도 전율은 여전하다. 잘 알려진대로 그녀는 뛰어난 연기력에도 불구, 올해까지 무려 일곱 번이나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 되고도 단 한번 수상하지 못한, 어찌 보면 비운의 스타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와 쌍벽을 이루는 골든글로브에선 여우주연상을 받고 자신의 심정을 절규하듯 쏟아냈다.

“이런 세상에! 정말 고마워요, 정말 영광입니다-중략-이 영화 캐릭터의 내면연기를 위해서 나는 아버지께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쳤던 어머니를 생각했어요. (하지만) 80대인 그녀가 언젠가 나에게 ‘난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어’라고 말했었죠. 그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모든 경험을 통해 배웠던 것은 여성들, 그러니까 우리는 양육자라는 것입니다. 그 것이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들이죠.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남편이 있을 수도 있고 파트너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성취를 찾아야만 해요. 우리도 우리의 꿈을 쫓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넌 할 수 있어, 마땅히 그래야만 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중략--그리고 나는 오늘 여기에 섰습니다.......”

글렌 클로즈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긴 영화는 더 와이프(The wife)로 우리나라에도 개봉돼 상영중이다. 이 작품엔 그녀의 실체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더 와이프에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작가의 아내역할을 맡아 열연했지만 문제의 작품이 실은 남편이 아닌 자신이 쓴 것임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그녀가 남편을 떠나려는 순간, 비로소 자신이 평생 질문해 왔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해답을 얻고 만면에 은은한 미소를 띠게 된다.

아주 헷갈리게도 주체이론의 대가인 주디스 버틀리는 젠더와 젠더 이데올로기를 아예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상 주체의식의 기준으로 삼아 왔던 남성, 여성이나 동성애. 양성애 등의 도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인간이 과연 누구인지를 물어볼 때도 그가 무엇이 되는지(is)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하는지(do)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성을 실체와 실존의 차원으로 바라본다는 취지이다. 배우 글렌 클로즈가 피를 토하듯 역설한 것도 바로 이 것이다.

글렌 클로즈

이는 남성들에게 각인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음을 일침한다고 볼 수도 있다. 바람둥이 남편에게 속아 가정을 이뤘지만 끝내는 남편과 아들한테도 버림받아 기구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힘든 현실이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면서 그럭저럭 잘 살았다”고 자위하는 여성들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같은 도식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건으로 이 나라를 성추문의 아수라장으로 타락시키고 있다.

-평소 산을 즐겨찾는 지인들과 네팔 트레킹을 감행했다. 해외 트레킹 중에서도 일반인들에게 가장 힘들다는 히말라야 쿰부 3패스 구간이다. 히말라야 관문인 루크라를 출발해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5364m)와 에베레스트가 코앞으로 보인다는 칼라파타르(5550m)를 오르는 지난한 과정이다.

과거 군생활 등을 통해 극한 체험을 남부럽지 않게 했다고 자위해 왔지만 이번 트레킹에선 개인적으로 생애 최초라는 역사를 여러 개 썼다. 보름동안 세수는커녕 손 한번 제대로 씻지 못한 건 처음이다. 순수하게 걸어서 5550m를 오른 것도 나로선 처음이다. 이 기간동안 대략 왕복 150km를 산행한 것도 처음이다. 성인이 되어선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고 자랑하던 건강이었지만 이번처럼 히말라야 감기몰살로 기침을 엄청나게 한 것도 생애 처음이었다.

평소 말로만 듣던 하늘을 찌를 듯한 고봉들, 탐세루크(6608m)를 시발로 아마다블람(6856m) 촐라체(6440m) 로체(8516m) 눕체(7861m) 푸모리(7161m) 등을 마치 옆으로 끼고 걷는 듯한 트레킹의 묘미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간헐적으로는 죽음까지도 예시하던 고산병의 고통까지도 무색하게 했다. 건강할 때 한번 쯤은 꼭 하고싶은 트레킹이었지만 과업(?)을 끝낸 대원들의 오가는 말은 너무나도 겸손했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더 사랑해야지, 더 베풀어야지,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등이 주류였다. 제 2의 삶, 자신만의 삶을 찾고 싶다면서 60을 훌쩍 넘긴 나이로 참여한 여성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었다.

하여, 나도 이 것들을 다짐하며 다시 생업을 위한 귀국길에 올랐다. 더 당차게 살아갈 것, 더 당당하게 사랑할 것, 모든 일에 더 진정으로 대할 것, 그러면서 잘 산다는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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