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혼자 살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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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혼자 살지 몰라”
  • 충청리뷰
  • 승인 2019.04.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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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집’ 시켜 줄테니 돌아오라는 전 남자 친구

아래 글은 충북의 모 대학교 교양강좌인 ‘젠더 & 섹슈얼리티’ 시간에 작성한 것이다. 글쓴이들의 요청에 따라 학교와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이름은 가명이다. 대학생들의 글을 통해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내가 그 친구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 중 하나는 나와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직장 내에서 부당하게 성차별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친구가 결혼 후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를 생각해주나 싶었다. 그런데 그냥 내가 집에 있으면서 육아에 전념했으면 하는 맘도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미묘했다.

물론 나도 어릴 적 엄마가 전업주부로 집에 계셔서 좋았던 점이 많았다. 또 여성이든 남성이든 주부로 생활하시는 분들의 선택에 대해 무시하거나 비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직 먼 미래 이야기 같은 아이나 가정보다는 가까운 문제인 내 직업이나 진로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게 당연하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가정에 헌신하기를 압박받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남자친구 본인은 절대 일을 그만두거나 할 생각이 없으면서 내 꿈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게 싫었다. 그 친구는 학벌도 좋고 졸업해서의 진로도 좋다. 돈도 굉장히 많이 벌 것이고 유망한 직종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추구하는 직종의 월급은 정말 작아 보이겠지만 단순히 금전적인 이유만으로 내 직업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무척 불쾌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더 절망스러웠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누가 더 벌든 중요한 게 아니라 둘 중 누군가가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게 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헤어진 후에 집 앞까지 찾아와 울고불고 빌던 전 남자친구는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에 가겠다고 했다.

의사가 되어서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다. 본인이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일하지 않고도 다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헤어진 마당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지만 결국 끝까지 얘는 아니구나 싶었다. ‘취집’시켜줄테니 돌아오라니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

나를 좋은 마음으로 응원을 하는 사람에게도, 딸처럼 나를 아껴주는 선생님에게도,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나는 성차별을 경험했다.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떤 것을 해야만 하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삶의 선택에 여성이기 때문에 한계가 생기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 나는 이러한 성차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특히 결혼을 기준으로 내게 주어지는 성차별적인 잣대를 어떻게 없애야 할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하고, 나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유물처럼 여기거나 내 한계를 규정짓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 이러다 혼자 살지도 모르겠다. 현재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여성으로서 내가 어떤 특혜도 제한도 받지 않고 내 삶을 선택하고, 존중받는 것이다. / 배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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