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박지원이 좋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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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박지원이 좋기만 한데…
  • 충청리뷰
  • 승인 2019.06.0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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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엄밀하게 말하면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정치인들의 막말은 종편채널에 그 책임이 크다. 종편이 초기 시청률을 잡기 위해 일부 자극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패널들로 재미를 보는 바람에 한 때 유사 프로그램이 노골적인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의 최대 수혜자가 박근혜 용비어천가를 불러 청와대 대변인까지 지낸 윤창중이었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어쨌든 종편이, 오랫동안 유지되던 방송 언어의 금도(襟度)를 무너뜨린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즐겨보는 종편 프로그램이 있다. ‘판도라’라는 대담 프로다. 성향과 스타일이 전혀 다른 정청래와 정두언 두 패널이 특정 정치사안을 놓고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이 참 재미있어서다. 어느 땐 서로의 표현이 살기를 느낄 정도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긴장감과 흥미는 오히려 더하다. 사전 예행연습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둘 간의 말에는 그래도 정도와 품위가 있다.

이 프로그램에 가끔 얼굴을 내미는 박지원은 또 어떤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누구는 얼굴을 대하는 것 자체가 싫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박지원만 나오면 기대감이 앞선다고 한다. 정치 현안에 대해 그가 구사하는 ‘말’ 때문이다. 시니컬한 그의 화법을 듣다 보면 미운 생각보다는 웃음이 날 때가 많다. 물론 이 역시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박지원 표 촌철살인은 우리나라 정치계에선 이미 알아주는 경지가 됐다. 어쨌든 그의 말엔 유머가 있다.

정치인들이 막말로 인해 구설수에 오를 때마다 나에게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그의 평소 인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궁예가 능통했다는 관심법도 모르고 관상학을 배운 적도 없지만 막말의 당사자들을 보면 얼굴상이나 이미지가 영 아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간적인 푸근함이나 세련된 모습보다는 꼭 전날에 과음한 것같은 불안하고 경직된 표정만 엿보인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역대급 막말로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들을 한번 곰곰이 떠올려보기를 주문한다.

요즘 노회찬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막말 퍼레이드가 훨씬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고 자책도 한다. ‘삼겹살 불판론’으로 대표되는 생전 그의 인간미 넘치는 풍자는 요새 정치인들에겐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저주의 악담만 넘쳐난다. 오로지 나만이 옳고 상대는 사라지거나 죽어 없어져야 할 백해무익한 존재 밖에 안된다.

정작 문제는 정치 밖에 있다. 정치인들의 막말과 이간질 때문에 국민들까지 서로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근자엔 하찮은 사석에서조차 피아(彼我)가 분명하게 갈린다. 단순히 정치성향의 좌파와 우파가 아니라 당최 상종하지 못할 적 대 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종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고육지책으로 통하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 ‘시국이나 정치얘기는 아예 입밖에 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어겼다간 십중팔구 왕따를 당한다.

눈만 뜨면 정치인들의 막말경쟁이 이어지고 보통 사람들의 SNS에서도 상호 포용보다는 격하게 반목하거나 냉소하는 언어들이 난무하면서 알게모르게 무너지는 것은 우리사회의 공동체 의식이다.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러한 현상이 가장 불편하고 또 버겁기조차 하다.
그동안에는 상호교류에 큰 문제가 없었는데도 요즘에는 정치성향이 다른 지인들을 대하기가 꺼려지는 정도가 됐다. 우리나라의 국가운용에서 정치가 지나치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로 인해 사람들의 정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 시국(?)은 말 그대로 비상시국이 아닐 수 없다.

정현종은 자신의 시 <경청>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정치인들이 민생투어만 고집할 게 아니라 시간이 나면 한번 읽어 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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