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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역설
한덕현 발행인

6월 10일, 당시 넥타이 부대에 휩쓸렸던 처지에서 이날 민주항쟁일을 대하는 심정은 매년 달랐지만 올해는 특히 심란하다. 지금까지는 6월 항쟁의 의미가 희석됨이 불편했다면 올해는 아예 본말이 전도되는 것같은 조바심에 우울증마저 엄습한다. 독재의 후예들이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역으로 독재자 딱지를 붙이고 있고 독재의 하수인이던 공안검사 출신이 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난리다. 살다보니 이런 아이러니도 있구나 싶다.


어차피 민주주의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없다. 북한조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내세우고 있고 과거 우리나라도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적이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아주 특이한 현상, 군사독재와 유신독재의 DNA를 물려받은 자유한국당이 촛불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을 향해 독재라고 부르짖고, 공안통치에 길들여진 황교안이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겠다”면서 차기 대권주자로 가장 높은 지지도를 누리는 현실. 이 또한 민주주의의 허구, 즉 완전하게 검증된 역사적 정당성도 미흡하고 요즘 유행하는 지속가능한 비전도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예견이라도 했을까. 정치학자 셸던 월린은 이미 오래전에 ‘도망치는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라는 말을 사용했다. 특정 시점과 상황에서 이 것이 민주주의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적 상황에 빗댄다면 박근혜 탄핵과 광화문 시민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의 진보정권에 절대 다수 국민들이 “이제 비로소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것”이라고 기대했건만 임기의 절반도 안된 시점에서 대통령 하야 및 독재 시비에 휘말리고 있잖은가. 정쟁을 떠나 이 것의 합리적, 논리적 타당성이 없다 하더라도 이 나라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는다.


이른바 한국적(?) 도망치는 민주주의는 이런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정당과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는 민주주의의 진화는 점차 변질되고, 대신 국가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가 대의민주주의의 상징인 정당과 의회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정부와 언론 사이의 피튀기는 싸움으로 전이되고 있고 이젠 시민사회조차 국가 관료제에 순응함으로써 결국 승자는 사회적, 경제적 강자와 엘리트가 되고 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을 보면서 끝내 머리 속을 짓누른 것은 이 나라 기층민중들의 삶, 제 아무리 ‘계획’적으로 산다고 해도 결코 기득권을 넘어서고 이길수 없는 계층이동의 한계와 좌절이다. 발버둥 쳐봤자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엔 갑과 을이 아닌, 을과 을의 전쟁에 빠지고 마는 패배감 말이다.


최저임금 도입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정권의 의지가 역으로 국가경제를 망치는 원흉으로 낙인찍히고, 경제가 그렇게 어렵다는데도 골프장엔 사람들로 넘쳐나고 외국행 항공기는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현실에서 그래도 이 시대의 기생충들이 의지할 것은 상식과 보편적 기준의 사회정의 일텐데 안타깝게도 이 것조차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도망치는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상식은 민주주의, 아니 민주주의 정치란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합의에 이르는 것이며 그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다면 이의 환상을 깨야 한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합리적 기준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서 인간 사이에 늘 내재하는 적 대 적 관계의 차원을 이해하는 데서 경쟁력을 갖는다고 한다. 적을 적으로 인정하고 그러한 적 대 적 관계의 상이한 형태로 드러나는 갈등적 조건에서만 인간공존의 질서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에 대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분석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민주주의의 역설> 저자 벨기에 샹탈 무페의 진단이다.


국회가 장기간 공전되면서 문재인 대통령과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영수회담 여부가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둘의 만남이 쉽지 않았던 그간의 과정은 샹탈 무페의 역설로 해석하면 일견 이해할만도 하다.


우선 두 사람의 적 대 적 관계가 왜곡됐다. 과거 독재권력의 후예정당을 대표하는 황교안은 민주주의 투사로 둔갑했고 민주주의를 내세워 집권한 문재인은 졸지에 독재자로 연일 매도된다. 그러니 둘의 만남이 임의롭고 자연스럽기는 싹수부터 틀렸다. 둘이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누더라도 지금으로선 국민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양쪽 지지자들간의 갈등만 더 부채질한다. 더군다나 지금 국민들은 도망치는 민주주의의 조짐에 극도로 실망하고 민감해진 상태다.


이 틈을 비집고 손학규 등이 우파와 좌파의 대립을 종식시키는 제 3의 지대를 만들겠다며 고개를 내밀고 있지만 이 역시 허망하다.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선거에 임박해 탄생한 제3 세력이 성공한 적도 없지만 민주주의의 역설로 보더라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적 대 적 타자간의 갈등과 투쟁으로 만들어지는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파괴함으로써 민주적 결핍만을 초래할 뿐이다. 대중영합의 포퓰리즘을 잠깐 부추기다가 사라질 것이다.


차제에 당부하고 싶은 건, 꼭 샹탈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진보는 더 이상 명분의 이상향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통치이념의 국민주입, 대국민 설득에 아직은 실패하고 있다. 그 것의 원인이 소득주도성장으로 대표되는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간 이견일 수도 있고 멀게는 친일에, 가깝게는 군사·유신독재에 부역한 언론들의 사활을 건 흠집내기 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의 집권세력은 선언적 명분을 넘어서는 국가경영과 조직관리 능력을 아직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한국당의 주장처럼 탁현민 식 쇼정치를 자제하고 집권세력의 도덕성과 내공부터 더 철저하게 다지면서 탈권위주의를 다시 곧추세우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도망치는 민주주의를 돌이켜 세워 안착하는 민주주의로 고착시키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다. 바로 이 것이 또 한번의 6·10을 보내는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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