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자는데 그렇게 화가 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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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자는데 그렇게 화가 나느냐?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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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인 국 신부(천주교 청주교구 오송성당 )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곧 거리는 성탄 대목을 기대하는 장식으로 가득할 테고, 아이들은 성탄 연극을 준비하며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장만하느라 즐거울 것이다. 동정녀가 막 하느님의 아들을 낳았는데 멀리서 별의 인도를 받아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과 순한 양을 키우는 목동들이 경배를 올린다.

깨끗한 겨울 밤하늘에서는 천사가 나팔을 분다. 그러나 성탄 주변 이야기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아기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의 미친 칼춤이 갓난아기들의 엄청난 목숨을 앗아갔고 아기 잃은 어머니들은 통곡하였다. 그것이 성탄의 정확한 현실이었다. 왜 이 아기는 탄생 순간부터 세상의 미움을 받았을까? 그의 삶이 어떠하였기에 종당에는 그런 슬프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을까?

성경은 아무도 미워한 적이 없던 예수가 세상의 미움을 사서 죽음에 이르는 연유를 이렇게 소개한다. 예수는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만 측은지심이 동하여 어루만지고 달래 주었다. 함께 아파하고 괴로움을 나누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했더니 병은 깨끗이 나았다.

이런 자비행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지배 권력은 일하지 말고 쉬라는 안식일의 ‘오래 관습’을 들먹이며 예수의 일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빌미로 죽음을 결의하였다. 지금의 우리로서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펄쩍 뛸 일이지만 오늘도 반복되는 역사의 어리석음이니 교훈으로 삼아보자.

안식일의 치유를 지켜보고 분노하던 사람들의 눈에 살기가 서렸던지 예수는 물었다. “너희들은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요한 7,14-24 참조) 그들이 시치미를 잡아뗀다. “당신은 귀신들렸소.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거짓말! 그렇다면 너희들의 터무니없는 분노는 무엇이냐? 태어난 지 여드레 밖에 되지 않는 갓난아이를 위해서는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면서도 참담한 병고로 삼십팔 년을 누워 지내던 인생 하나를 고쳐준 것이 그리도 화가 치미는 일이었단 말이냐!

너희들이 내세우는 분노의 근거는 율법과 안식일 규정이다. 천 번을 물어보고 만 번을 따져 봐도 죽어가는 목숨 살리자는 율법이요 쓰러져서 우는 이 곧추 세워 다독거리자는 안식일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법과 규정의 본연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법성을 운운하며 죽음의 올가미를 씌우려하느냐? 나는 그저 몸져누운 자의 고통을 보고 동련은 아니면서도 절로 상련의 마음이 생겨 그 손을 잡아 일으켰을 뿐이다. 그것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요 그 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살림’과 ‘모심’의 마음으로만 살고자 했던 나의 처신이 그렇게도 못 마땅하였느냐? 본시 착하고 순했던 너희가 오늘은 이렇게 살기를 번득이며 미움의 칼을 가는 숨은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다오.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과거사 진상규명, 언론법 개정 등의 개혁법안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안식일에 사람 하나를 온전히 고쳐준 것이 그렇게 화가 나느냐?”(요한 7,24)하시는 물음을 그들에게 돌리고 싶다. 그 사람은 중풍병자였다. 장장 삼십 팔년간 누워 지내며 짐승처럼 신음하던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우리의 현대사를 꼭 닮았다.

우리는 일제 36년과 군사독재 35년의 질곡에 갇혀 괴로워하며 매우 기형적인 성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나마 겨레의 지혜와 부지런함으로 일군 귀한 결실이었다. 하지만 식민통치와 군사독재가 남긴 유무형의 잔재들이 여전히 득세하며 부패와 비능률의 구조들을 견고하게 유지시키는 통에 이를 일소하지 않고는 민족의 장래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나온 치유책이 4대 개혁법안들이다. 최소한의 선의와 기본적인 역사의식만 갖추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선선히 동의하게 되는 거의 상식적인 법안들인데도 이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도도하다. 오히려 구악들이 떳떳이 동맹하여 맹위를 떨치고 있다.

역사는 그 아기가 태어나던 시절을 난세 중의 난세로 기록하고 있다. 아기가 태나서 난세가 된 것이 아니고 그 착한 아기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던 사악한 기운 때문에 난세였던 것이다. 오늘의 난세도 마찬가지다. 너나 할 것 없이 고요한 마음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가의 성난 기운을 다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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