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도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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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도 말을 한다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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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편집인
일반인들이 교회나 사찰 등 종교시설을 찾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건하려 한다. 종교는 그 이미지만으로도 범부들에게 외경(畏敬)을 안긴다. 이러한 자발적 발로 뒤엔 원초적인 기대감이 깔려 있다. 그곳 세계는 뭔가 다르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굳이 더 욕심을 낸다면 일상의 형이하학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을 것같은 형이상학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종교인들이 이를 실천하고 있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그러나 최근 불교 관련 기사를 쓰면서 이런 ‘고정관념’에 동요가 생겼다. 특정 종교를 갖지 않은 다신론자(?)로, 불교의 그 깊은 뜻을 감히 헤아리지 못함을 몇 번이고 자책하면서도 취재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무겁기가 그지없었다. 폐쇄적인 사찰운영, 일부에 국한되겠지만 그곳 인적 구성의 몰가치성, 그렇다보니 신자나 방문객들이 가장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바치는 시주금의 용처가 궁금해지고, 그동안 사찰에 들를 때마다 맹목적으로 행한 나만의 의식-기껏해야 몇푼의 시주금에 3배가 고작이지만-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종교는 믿는데에 의의가 있다”고 하는데 요즘처럼 이런 ‘명제’가 불편한 적도 없었다.

도내 불교계에 대해 비판기사를 쓰자 당장 비난이 쏟아졌다. 종교를 너무 사회학적 시각으로만 재단해 권위를 실추시킨다느니. 다른 종교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느니 하는 쓴소리가 직·간접으로 가해졌다. 특히 괜한 문제를 침소봉대해 교구 내의 반목을 부추긴다는 비난은 많은 고민과 갈등을 몰고 왔다. 그러나 불교계에 대한 비판이 나같은 주변인보다 독실한 신자로부터 더 냉정하게 제기되고 있음을 목격하고선, 종교를 잘못 건드렸다간 본전도 못 뺀다는 언론계 불문율을 잊고 취재에 임할 수 있었다.

특히 법주사 스님의 갑작스런 죽음을 취재하는 과정에선 오기까지 생겼다. 죽은 당사자는 이미 화장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유족과 경찰, 병원, 법주사의 진술이 극과 극으로 달라지는 데는 할말을 잊었다. 타살 의혹과 관련해 누가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말을 하는지 이젠 분명히 알 것같다. 언론으로서 이를 밝혀야 한다면 그들의 거짓이 차라리 진실에로 인도하는 종교적 통찰이라고 받아들이겠다. 그렇더라도 안타까움은 남는다. 왜 그의 죽음이 천대시되고 왜곡돼야 하는지. 이를 둘러 싼 진실과 거짓의 딜레마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과거 암울했던 시절, 굳이 의문사같은 어두운 ‘의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엔 귀천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편의적으로 그렇게 분리할 뿐이다. 때문에 원인이 밝혀져야 그의 영혼이 비로소 차별없는 편한 휴식을 취할 것이다. 죽은 스님의 유족들도 말한다. 원인이 밝혀지면 억울하게 간 원혼의 한이 풀릴테고, 그러면 깨끗이 용서할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마지막 성역, 종교계가 과연 언제까지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좋은 계기였다.

개혁의 생명력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말이 간절하게 다가 왔다. 적어도 집단의식에 묻혀 버린 종교의 ‘실체’가 언젠가는 적나나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는 간혹 종교인들이 파렴치한 ‘일탈’을 자행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 같은 바깥 사람이 보기엔 원초적으로 막혀 있는 그 무엇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것을 깨야 비로소 종교가 자유스러워 질 것으로 보인다. 그 간극의 실체가 너무 중압감으로 다가 왔다.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지켜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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