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동학의병 추정 집단묘 베일 벗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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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동학의병 추정 집단묘 베일 벗나
  • 김천수 기자
  • 승인 2019.07.0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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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읍 사정리 대형 봉분 2차 발굴조사
동학의병 집단 묘소인지를 밝힐 2차 발굴조사가 지난 1일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강당마을 임야에서 시작됐다. 발굴에 앞서 관계자들이 개토지를 바라보고 있다.

항일의병 동학군의 집단 무덤 여부를 밝히려는 ‘음성 사정리 동학군 항일의병 묘소 2차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지난 1일 오전 10시 충북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8번지 강당마을 일원 임야에서 문화재 전문가들이 참여해 학술자문회의를 열고 발굴에 들어갔다. 앞서 지난달 20일에는 2차 발굴조사를 알리는 개토제가 실시됐다.

이날 학술자문회의에서는 1차 발굴조사 결과 보고 및 묘소에 대한 향후 보존관리 방향 등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 군 관계자는 “2017년 1차 발굴조사에서는 어떠한 유물도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면서 “2차 발굴조사 과정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호서문화유산연구원은 2017년 9월 13일부터 10월 1일까지 1차 발굴조사를 진행했지만 어떤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의 집단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 봉분은 모두 6기로 확인되며 1차 조사는 1기에 대해서만 시행됐다. 연차 발굴조사로 계획된 가운데 이번 2차 조사는 2기·3기에 대해 실시된다.

이번 2차 발굴조사에서 봉분의 성격이 실제 동학군 무덤인지가 밝혀질지 주목된다.
마을 주민들에 의해 알려진 이곳은 2016년 음성군의 지원으로 학술대회가 개최되면서 발굴조사로 이어졌다. 당시 지역에서는 ‘동학군 난리묘’로 구전되는 집단무덤 형태가 ‘항일 의병묘’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돼 학술대회로 이어졌다.

음성향토사연구회(회장 김영규)는 2016년 5월 27일 음성군 후원으로 음성문화예술회관에서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항일의병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술대회에서 신영우 충북대학교 명예교수는 “의병일 가능성이 많다”면서 “실증연구 등 검증작업이 많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율산일기’와 ‘사정일기’ 같은 19세기 말 음성의 사회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더 많이 번역 간행된다면 자세한 역사를 서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걸순 충북대 교수도 “무연고묘 일수도 있고, 1907년 9월 19일 의병전투 기록이 있어 희생자묘 일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하고 “일부 시굴을 해서 매장지인지 분간을 해서 기념사업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이유로 박 교수는 충남 홍주의사총을 예로 들어 “기록엔 86명이라고 돼 있었지만 끊임없이 문제 제기가 돼 발굴을 해보니 900기가 나왔다”면서 “구전과 향토지도 동학과 의병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발굴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음성지역, 동학포교 근거지
반면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시굴한다고 해도) 분골의 연대가 추정일 뿐”이라며 동학군묘 또는 항일 의병묘의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면서 “음성지역에서 동학군의 집결과 전투, 해산 등 일련의 과정을 서사화·스토리텔링화 하여 문화콘텐츠로 만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동학의병묘’ 명칭 사용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로 황산(삼성면 능산리), 무극장터(현 금왕장), 되자니마을(금왕읍 도청리), 동학군묘(음성읍 사정리 강당말), 이헌표 고택(음성읍 용산리) 등 5곳을 들었다. 그는 이곳을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해 법적·제도적으로 보존·관리할 필요성을 밝혔다.

특히 학술대회에선 음성지역에서 발생한 의병 투쟁이 최소 30회 이상인 것으로 자료를 통해 밝혔다. 박걸순 교수는 “무극 장터는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농민군과 의병의 주요 활동 거점이 됐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한말 음성지역의 사회경제적 동향과 의병 투쟁’ 논고에서 ‘음성군양안(陰城郡量案)’, ‘이곽포원록(李郭抱寃錄)’, ‘진중일지(陣中日誌)’,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등의 자료를 분석해 이 같이 밝혔다.

당시 학술대회는 전년도 가을에 이상정 도의원(당시 군의원) 등 음성군농민회 회원들이 마을 산에 있는 ‘동학무덤’을 벌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금왕읍과 가까운 이곳은 음성읍 용산리로 넘어가는 옛길(사정고개) 옆에 방치된 채 벌초 외에는 특별한 관리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음성군은 학술대회 및 묘역 안내판 설치, 주변 정비 예산 2000만원을 지원했다. 이곳은 마을에서 1㎞, 고개 정상에서 200여m 떨어져 있고, 주민들은 동학혁명군 집단묘로 전해진다며 부정기적인 벌초를 실시하고 마을 향토지 ‘부용’에 관련 내용을 싣기도 했다.

부용지는 “충북 의병일지에 ‘1896년 1월 22일에 제천의병진이 단양에서 승전한 것을 필두로 하여 이해 6월 8일에는 제천의병진이 음성에서 전투하고 1907년 9월 19일에 의병 약 200명이 충북 사정리에서 교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적고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은 ‘동학군 320여명이 와서 싸웠다’는 증언과 ‘동학난리묘’라고 전하는 5기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싸우다가 죽은 의병으로 여겨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동학을 창도한 최시형은 충청도의 청주와 충주를 왕래하며 포교를 하였다. 최제우는 충주에 여러 차례 머물며 포교를 하였는데, 충주의 동학 근거지는 외서촌(外西村)이었다”고 적혀 있다. “외서촌은 당시 동학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라고 싣고 있다.

이어 “외서촌은 현재 음성군 금왕읍과 대소면·삼성면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금왕읍 내송리 비선거리는 외서촌의 관문이었다. 당시 외서촌은 충주목 관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도둑이 들끓었으며, 관리들의 가렴주구도 극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2차 발굴조사 결과 향토사료와 같이 음성지역이 동학포교의 주요 근거지였음이 확인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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