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산 촛불이라는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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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 촛불이라는 포퓰리즘
  • 충청리뷰
  • 승인 2019.07.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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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트럼프가 정전 66년 만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은 건 다분히 이벤트의 성격이 짙다. 실제로 미국 외신들은 준비되지 않은 회담임을 거론하며 이 점을 적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막상 뒤에서는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트럼프의 기습적인 트위터 제의에 역사적인 사건이 단 시간에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세기의 연기자, 트럼프라는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본인의 자랑처럼 전임자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 시추에이션 이었다. 국가 간 명분과 절차를 따지고 서로 조건을 저울질하며 제도와 규범부터 내세우는 기성정치와 외교의 룰을 준용했다면 이렇듯 갑작스럽게 한반도에 훈풍이 불어닥칠 수는 없다. 이 것의 지속가능성은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참 기발한 발상이었지만 그렇다고 일부 언론의 표현처럼 기적으로까지 추켜세우건 좀 부담스럽다. 두 가지 측면에서다. 하나는 트럼프의 럭비공 스타일, 즉 김정은에 대해서도 들었다 놨다 하는 평소의 장삿속 접근법을 감안하면 이번 김정은-트럼프의 번개만남은 언제든지 예측가능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론 철저하게 심사숙고한 전략적 접근은 아니었더라도 기존 의 규격화된 질서에 의존하기보다는 대중에 호소하려는 정치의 시대적 흐름이 그같은 트럼프 행동의 효율성을 이미 충분히 예고하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파격과 파괴력을 얘기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 대중영합 내지 인기영합주의로 해석되는 ‘포퓰리즘’만큼 지난 역사를 통해 정치적으로 부침이 많았던 용어도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말은 늘 긍정보다는 부정의 측면으로 출몰했고 지금도 여전히 정쟁의 도구로 애용(?)되고 있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도 포퓰리즘은 논리적 담론을 멀리한 채 비이성적 감성의 소재로만 거론되면서 그 의미조차도 아예 몰가치한 것으로 각인된지 오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백 년전의 민주주의, 백년 전의 마르크스주의도 결국엔 포퓰리즘의 산물이다. 둘 다 대중들이 기성체제의 과두제(寡頭制)에 반기를 들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을 대중 정치의 새로운 구성 쯤으로 해석한다면 최근 우리나라를 휩쓸거나 휩쓸고 간 ‘노란 리본’과 ‘촛불’ 그리고 ‘태극기’ ‘갑질’ ‘미투(me too) 등도 이의 범주에 해당된다. 엘리트가 아닌 다중이 직접 주인이 되려는 결집과 이에 따른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 그리하여 기존의 국가기제로는 해결이 안 되던 사회·정치적 난맥상에 문제제기를 하고 또 해결까지 하고 있잖은가.

무려 84일의 국회공전에도 국민들의 원성은 아랑곳 않고 흔들리지 않게 당리당략과 정쟁에만 몰두하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국민소환의 목소리가 커졌던 것 또한 포퓰리즘적 발상의 접근으로 봐야 한다. 오랜 세월 민주주의의 금과옥조로 여겨졌던 대의(代議)정치가 국민신뢰를 원초적으로 잃어가고 있다는 증표나 다름없다. 국회와 정당에 더 이상 기대감을 갖지 못한다는 것, 결국 인간은 선하지 않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정치권력 또한 결코 선하지 않다는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경고를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가장 꽃피워야 할 21세기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국민과 대중보다는 엘리트 그들만의 특권과 영일(寧日)을 도모하는 과두 관료제 그리고 허울좋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항하여 포퓰리즘은 이 것들의 무책임과 이기주의를 척결하기 위해 다시 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대중정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절박함이 얼마나 컸으면 좌파 포퓰리즘의 급진화를 주장하는 샹탈 무페는 포퓰리즘을 아예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포스트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최고 대안으로까지 단정짓고 있다.

(책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청주테크노폴리스와 도시공원의 민간개발로 시민단체와 갈등을 빚던 청주시가 급기야 구룡산 촛불시위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고 있다. 한범덕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까지 거론되는 지경이다. 이 것의 성사여부를 떠나 시정을 향한 시민들의 촛불시위는 민심의 단면 ‘실체’라는 점에서 결코 예사롭지 않다.

물론 아직은 참여세력의 한정성과 주민소환 가능성의 희박함을 들어 구룡산 촛불을 무시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특히 공직사회에선 평가절하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포퓰리즘의 확장성 즉 포스트민주주의를 대체한다는 그 효용성과 폭발력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 시장은 지금 정치성향의 원초적인 지지자들과도 반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 할 수 있다.

일단 시민들이 구룡산 촛불을 들었다는 건 현재 청주시민들이 민주주의의 재구성, 탈(脫) 정치와 탈 정당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 현실적인 표현은 청주시의 관료 엘리트주의, 관료지방자치에 맞선 시민들에 의한 포퓰리즘 자치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청주시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가 전문가인데 무슨 소리냐”며 포퓰리즘의 최대 타깃인 과두(寡頭)와 엘리트의식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대중의 공분을 스스로 자초한 셈이다.

그러기에 지금 청주시민들은, 비록 아직은 소소하다지만 기성 제도권 행정에 저항하고 이를 대중의 의지로 대체하려는 새로운 정치실험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 때마다 강조하는 ‘청주시가 시민불통의 독선을 밀어붙이고 청주시의회는 시민의 편에 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포퓰리즘에 자생하는 일종의 혁명의식의 발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광화문 촛불의 궁극적 배경도 박근혜로 상징되는 당시 정부의 무개념한 독선·무능과, 이럼에도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던 국회의 무용론에 대한 악화된 국민여론이었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은 그 당시의 단일 사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이번 구룡산 촛불이 중도에 사그라진다고 해도 앞으로 청주시와 시장은 시민들의 학습효과로 인해 또 다른 안좋은 상황을 필히 겪을 수밖에 없다. 불리한 일이 자꾸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머피의 법칙은 ‘잘못된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항상 잘못된다(anything that can go wrong will go wrong)’는 상식 때문이고 청주시의 경우 이를 부추기는 것은 ‘엘리트’라는 관료의 독존의식과 독선 때문일 수도 있다. 산하 공무원들의 각종 비리로 바람잘날 없던 청주시가 지금 테크노폴리스와 도시공원개발 등 여러 난제로 큰 곤란에 빠진 현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청주시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도시공원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음습하게 뒤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사람, 업자들을 눈치볼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시민들과 대화하라는 것이다. 형식과 조건은 필요없다. 이럴 땐 막가파 트럼프가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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