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민주주의와 주민소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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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민주주의와 주민소환제
  • 충청리뷰
  • 승인 2019.07.0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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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승 우 풀뿌리자치연구소‘이음’ 연구위원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학교나 직장, 동네, 가정 등 시간을 보내는 대부분의 곳들이 민주주의와는 상관없다. 경험한 적이 없으니 민주주의는 멀게만 느껴지고 일상생활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나마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기할 수 있는 곳은 몇 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 뿐이다.

근대의 대의민주주의는 유권자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대표를 선택하고 대표가 정의롭게 그들의 뜻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민의 정치는 선거로 제한됐고, 정치는 의회와 행정부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정치인이 생산하는 정책을 생산하고 구매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변했다. 시민은 부조리한 일을 겪어도 관객처럼 물끄러미 그네들의 정치판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관객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관객민주주의라는 말에는 모순이 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의미는 주인됨을 뜻하는데 관객은 지나가는 손님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과 관객이 서로 말을 건네며 세계를 조금 더 넓히면 관객도 참여자가 될 수 있지만 그 역시 관객의 주인됨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이다.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관객을 배제할 뿐 아니라 배신해 왔다.

시민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지 못하고(자신의 선호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거나 드러낼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 또 자신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보수화된 언론들이 쏟아내는 온갖 이데올로기와 선전, 조작에서 시민은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에서조차 시민은 선거기간에만 자유로울 뿐 나머지 기간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객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여러 직접민주주의 장치들이 고민되어져 왔고, 현행 지방자치제도에는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 등이 도입되었다. 특히 2007년 5월부터는 주민소환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주민소환제도는 탄핵과는 달리 범죄나 비행 이외의 사유로도 공무원을 해직시킬 수 있는 제도로, 한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지방의원을 소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임명직 공무원도 주민소환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동안 주민소환투표가 실제로 진행된 경우는 총 8번에 불과하고 실제로 소환된 사례는 경기도 하남시의 시의원 2명 뿐이다. 주민소환투표에 필요한 청구권자의 수가 많고, 투표권자 총수의 1/3 이상이 투표하지 않을 경우 투표함 자체가 개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소환제도는 기대만큼 잘 이용되지 않았다.

시민들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2019년 1월 22일 행정안전부는 국무회의에서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에 따르면 이제 투표율과 관계없이 투표 결과가 공개되고, 투표권자 총수의 1/4 이상이 찬성하면 소환이 성립된다. 즉 투표권자의 25%가 단결하면 시도지사나 시장, 지방의원들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 수 있다. 인구가 많은 지자체의 경우 청구권자의 수를 낮춰서 소환을 가능하도록 했고, 특히 온라인 주민소환투표 청구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개정안이 국회만 통과하면 주민소환제도는 ‘그림의 떡’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방법이 된다.

지방선거 후 1년이 지나야 한다는 주민소환의 제한조건이 이제 7월 1일부로 충족되었다.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하는 시장, 그런 시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시의회가 긴장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제대로 자기 권리를 행사할 때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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