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체, 투쟁없인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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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체, 투쟁없인 안 된다.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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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본지 편집인 )

전공노 파문이 충북에 또 한가지 기록을 안겼다. 전국 최초의 노조해체와 잇따른 탈퇴, 그리고 기왕에 맺은 단체협약안까지 일방적으로 파기한다는 소식을 중앙언론의 주요 뉴스로 접하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그야말로 전국에서 처음인데도 얼굴은 불거졌다. 정부의 서릿발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전공노의 위축이 필연적이었지만 왜 하필이면 충북이 강자의 논리에 납죽 엎드리는데 처음이어야 하는지, 만약 이것이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먼저 일어났다면 서운함은 덜 했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나서지를 말지, 이건 전공노의 위법, 위헌여부나 이념을 떠나 우리가 살아 가면서 항상 부닥치는 원초적 신념의 문제다. 지금의 노동운동이 정착되기까지, 그리고 전교조가 합법화되기까지는 무수한 세월의 투쟁과 희생이 따랐는데도, 공직자의 단체행동권까지 요구하는 파업을 강행하면서 지금의 역공을 예상하고 대비하지 못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공직자의 노동운동은 어차피 우리 사회가 성숙되고 선진화되면 언젠간 자연스러워진다. 지금처럼 관습적 개념인 공복(公僕)의 족쇄에 묶여 모든 것이 일거에 매도되고 폄하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들에게 기껏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것 쯤으로 인식시킨 전공노의 전략 부재를 탓하면서도 비록 일부 시·군에 국한되지만 충북이 가장 먼저 포기하는 모양새를 보인 것은 못내 아쉽다. 이는 국가적 현안 때마다 불거지는 피학증(被虐症), 그 더러운 자학증후군을 떠올려서가 아니다.

바로 얼마전에도 우리는 중앙공원에 모인 사람들의 머릿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가. 신행정수도 사수대회의 공허함, 도지사가 안 나오고 시장과 도의원도 안 보이고, 공원에서 윷놀이하던 노인들을 모두 합쳐 고작 300명이었다는 ‘실상’이 바로 우리의 현 주소다. 싸울 때 대차게 싸우지 못하고 눈치와 입으로만 세상을 재단한다면, 고작 핵폐기장 하나로 똘똘 몽쳐 지역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전남 무안이 부러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1989년 쌍철용 사건을 기억한다. 역시 전국 최초로 전대협을 탈퇴하는 바람에 이 때도 충북은 전국 언론을 신나게 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금 운동권 출신과 개혁세력들이 청와대와 국회를 갈짓자로 활보하는데도 충북 출신들은 눈을 씻고 봐야 볼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런 시스템의 가치와 당위성을 옹호하는게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함을 탓하는 것이다.

광복 이후 대통령은 커녕 총리 한명 내지 못한 원인이 이 때문이었다면 아니라고 부인하기가 어렵다. 2년전 충청리뷰 검찰사태 때 가장 힘겨웠던 것은 국가권력의 남용과 횡포가 아니라 “무조건 숙이라”는 주변의 충고와 성화였다. 충북의 시계는 여전히 이런 굴종과 자기비하에 맞춰져 있다. 그동안 눈만 뜨면 충북으로선 절체절명의 현안이라고 부르짖던 신행정수도 사수대회에 고작 300명이 나오고, 정부의 엄포 한방에 만세를 불러서야 어디 제대로된 평가를 받겠나. 6·25 때 완장의 수준, 대세에 편승했다가 그 대세가 무너지면 모조리 난도질 당하는 편의적 ‘신념’으론 충북은 결코 주류가 되지 못한다. 강자의 논리는 집요하다. 언제든지 스스로를 관철하려는 속성으로 보편적 지배력을 획득하며 자신들만의 사회질서를 강요한다. 전공노의 파업 좌절 이후 자치단체의 마녀사냥이 이를 잘 입증한다. 충북이 이런 강자의 논리에 항상 쉽게 먹힌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과거 삼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충청도의 역사적 배경이나,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勢道)와 재리(財利)만 좇는다(이중환)’며 줏대없는 사람으로 묘사한 잘 난 이들의 왜곡으로, 지금도 수돗물에 불소를 넣는 하찮은 국가 정책에까지 충북이 실험도(實驗道)로 이용된다면 이젠 들고 일어서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TV에서 지겹게 보아 왔던 충청도 머슴과 충청도 식모가 지금까지도 “선상님, 편지는 워따 부쳐유(모 기업의 TV광고)”의 덜 떨어진 모습으로 반추된다면 이젠 더 이상 이를 용납해선 안 된다. 그 인식의 잔재를 걷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용기’가 절실한 것이다.

이젠 우리 충북이 때가 되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정말로 질풍노도같은 한바탕 신명나는 기개를 곧추세울 필요가 있다. 세상 한번 멋지게 바꿔보자며 깃발을 높이 올릴 그런 날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완벽한 대척(對蹠)이 되레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케 하고 통로를 연다. 적당한, 등거리 인식과 처신이 모든 것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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