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가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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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가지 않는 이유
  • 충청리뷰
  • 승인 2019.07.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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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제목만 보고는 근자의 반일감정에 편승한 치기로 오해하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순전히 개인적인 얘기이고 또한 의미없을 수도 있다. 다만,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불거지는 일련의 한·일간 핑퐁식 신경전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적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시아권 여행은 종종 하는 편이지만 아직 한 번도 못 간 곳이 일본이다. 못 간 것이 안 간 것이다. 지금 중장년 언론사 종사자들은 아시권의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지금은 김영란법 때문에도 꿈도 꾸지 못하지만 출입처의 해외출장에 동행해 취재 명목으로 공짜여행을 즐기던 시절, 가까운 일본은 출입처의 제의만 있다면 큰 부담없이 다녀올 수가 있었다. 물론 나에게도 몇 번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때마다 다른 동료들에게 양보했고, 지금도 당사자들한테 본의아니게 고마움(?)을 전해듣는다.

일본을 가지 않는 이유는 물론 편견 때문이다. 꼭 편견은 아니더라도 가고싶은 마음이 별로 안 생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질서, 그들의 선진문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국가와 사회의 기계적인 운영시스템, 이런 것들에 대한 부러움이 솔직히 나에겐 없다. 오히려 가식(假飾)을 떠올린다. 일본인들에게 큰 깨우침을 안겼다는 과거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와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도 관심있게 읽었지만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들의 정직하지 못한 이중성만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그 때마다 어릴적 동네 어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듣던 일제 주재소(지금의 파출소 성격)와 일본순사들의 만행 그리고 참혹하고 치욕적인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등이 머리에 그려졌다. 사람을 괴롭히고 죽여도 너무 변태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약자에 대한 비인간적 가학성(사디즘)이 일본만큼 노골적인 나라도 없다는 생각을 곧추세우게 된 것이다. 요즘 야동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성문화도 마찬가지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한·일전을 앞두고 터져나온 “한국이 일본을 따라 오려면 30년은 걸린다”는 이치로의 망언에는 그의 살기가 가득한 얼굴 때문에도 잠자리까지 불편했다. 야구의 천재라는 수식어로 방송에 등장할 때와 우리나라를 향해 악담을 퍼부을 때의 표정이 너무나도 달랐다. 한국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의 극도의 오만함이었다. 단순히 야구 차원이 아닌 평소 일본의 대(對)한국관을 보는 것같아 치가 떨렸다.

국제여론으로부터 푸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트럼프에게 온갖 아부를 떨던 그들이 먼길을 찾아간 우리 대표단한테는 허름한 창고로 안내해 놓고는 물 한 컵도 건네지 않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또 한번 생각을 굳힌 것은 그들의 ‘변태적 이중성’에 대한 확신이다.

부부가 이혼하고 싶어도 각자 챙길만한 재산이 축적될 때까지 20, 30년을 시치미떼고 산다는 그들이다. 겉으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말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정보를 흘려 이간질을 한다. 어차피 한국전쟁의 특수를 노려 국가산업을 부흥시킨 나라가 일본이고 지금도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예의 이중성을 견지하며 남북분단을 가장 즐기는 나라가 일본이다.

이러한 내성의 일본이 지금 우리나라를 손보겠다며 이를 갈고 있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그들의 실제 속내는 한국을 손보는 정도가 아니라 이 참에 다시 굴욕적으로 무릎을 꿀리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런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일본에 대처하는 우리정부의 자세, 아니 정권 실세라는 사람들의 대책없는 비분강개다. 당장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조국의 SNS가 그렇다.

일련의 일본 처사에 대한 국민들의 민심폭발은 당연하다. 규탄과 불매운동이 아니라 결사항전의 전투의식으로 선전포고를 한다고 해도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은 상처가 크다. 더구나 그들은 지금 우리정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 대통령의 탄핵까지 입에 올리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한국을 여전히 자신들의 속국쯤으로 여기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와 정권 실세들의 반일 언사는 일반 국민들의 반일 행동과는 다를 필요가 있다. 조국처럼 국민감성을 자극하는 극단의 표현은 우선 향후 상황전개에 따른 퇴로조차 막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원칙적이고 논리적 대응으로 맞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일본의 마지못한 출구전략까지 원천봉쇄하는 역기능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똑같은 취지의 말을 하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의 침착하고 냉정한 화법은 일단 긍정적이다.

어차피 일본은 이미 확인됐듯이 온갖 구실과 빌미, 거짓 등을 동원해 끊임없이 우리의 허점을 노릴 것이다. 이제껏 숱하게 반복된 역사왜곡과 교과서 왜곡만 보더라도 그들의 이런 내공은 쉽게 철회되거나 고쳐지지 않는다. 집권세력들이 국민을 향해 이념의 이분법적 가름을 충동질하는 것 또한 극히 위험스럽다. 세상의 어떠한 싸움에서도 내부분열과 적전(敵前)분열은 곧 패전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결과 정부자세에 반발하는 건 그들의 상식일 수 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을 퉁치고 싶었고 또 이를 흔들림없이 강변하던 그들이기에 당연히 뒷통수를 맞은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간 협정이라고 해서 피해자 개인의 배상청구권까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적 법리이자 상식임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앞으로 전개할 여론전이나 외교전략은 결코 세계인을 설득하지 못할 게 뻔하다. 이번 분쟁이 감정싸움으로 변질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인내하며 금도를 유지한다고 해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게 하나 있다. 이번 한일 분쟁을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친일 언론과 친일 인사들에 대한 국민차원의 응징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무역분쟁이 정리되고 나면 가장 먼전 손볼 게 ‘한반도 역사의 기생충’인 이들이다. 그 때까지 2019년 한 여름의 한일경제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아직까지 일본을 용서하고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본은 단 한 번도 지난 역사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예수가 배신자 유다를 용서하지 않은 게 아니라 유다에게 용서받을 준비가 안 됐듯이, 일본은 여전히 그 비열한 ‘변태적 이중성’ 때문에도 용서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은 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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