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中伏)에 돌아본 직장 민주화
상태바
중복(中伏)에 돌아본 직장 민주화
  • 충청리뷰
  • 승인 2019.07.24 11: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 원 근 법무법인 ‘청주로’ 변호사

내가 일하는 법무법인의 직원은 변호사 포함하여 23명이다. 해마다 해오던 대로 올해도 중복에 삼계탕을 같이 먹었다. 오순도순 모여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난 7월 16일부터 시행된 개정 채용절차법(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 화제가 되었다.

개정법은 “구인자는 구직자에 대하여 그 직무의 수행에 필요하지 아니한 구직자 본인의 용모·키·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 구직자 본인의 출신지역·혼인여부·재산, 구직자 본인의 직계 존비속 및 형제자매의 학력·직업·재산 등의 정보를 수집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이를 위반하면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우리 법인도 그동안 채용과정에서 지원자의 출신지역·혼인여부, 직계 존비속 및 형제자매의 학력·직업에 대해서는 별 문제의식 없이 물어봤다. 엄밀히 따지면, 이런 내용들은 직무수행 능력과 직접 관련은 없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쉽게 확인이 가능한 부수적인 내용들로 직무수행 능력 유무를 판단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경우 지원자는 이런 것들을 공개하는 것이 부담된다. 생계를 위해, 어떻게든 직장을 잡아야 하는, 구직자들의 궁핍한 사정을 악용한 측면이 있다. 중복에 점심을 같이 한 우리 법인의 직원들 상당수도 면접 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채용절차법은 상시 30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에만 적용되는데, 앞으로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중복 점심 자리에서 나온 불필요한 정보 수집 이야기는 수사기관에서 작성하는 피의자신문조서로 이어졌다. 현재 수사기관에서 피의자를 조사할 때 범죄 혐의사실을 조사하기에 앞서 피의자의 학력, 경력, 가족관계, 종교, 건강상태, 재산정도, 전과 등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물어 이를 조서에 남긴다. 범죄사실과 관련 여부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묻는다. 일단 조서에 들어가게 되면 정보 주체 이외의 사람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내가 피의자의 변호인으로서 조사에 참여했을 때 수사관이 위 내용들을 물어오면 피의자는 순간적으로 그런 것에 왜 답해야 하나 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조사를 받아야 하는 궁박한 처지에 있다 보니 대부분은 그냥 순순히 답을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진술을 거부하면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냥 응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변호인도 마찬가지다. 법적으로는 당연히 거부할 수 있어도, 진술 거부를 트집잡아 보다 억압적으로 조사를 하거나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 피의자에게 적극적으로 진술거부권 행사를 권유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변호인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인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물론 변호사협회 차원에서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면접이나 수사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정보 수집은 모두 상대방의 열악한 지위를 악용한 것이다. 당신이 밝히고 싶지 않은 정보를 내게 털어놓아야 할 만큼 나는 당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심리도 어느 정도는 작용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입사를 하거나 조사를 받게 되면 당사자는 계속 ‘을의 지위’에 있게 되더라도,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감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개인이 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채용절차법의 개정은 아주 높게 평가하고 싶다. 사생활과 관련된 정보를 보호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한 내용이다.

나아가 개정 채용절차법과 같은 날 시행되는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도 직장 민주화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개정법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신고한 사람에게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는 법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