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 전해지는 신미대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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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에 전해지는 신미대사 스토리
  • 권영석 기자
  • 승인 2019.08.08 09: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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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신미대사는 특명 받아 복천암에서 언어 연구했나
현재 복천암 영정, 부도탑, 세조길, 대궐터 등 흔적 남아
복천암 전경 /육성준 기자

충북에는 신미대사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신미대사는 충북 영동에서 나고 자라 성균관에 입학했다. 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퇴학하여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속리산 복천사로 와서 오랜 시간을 지냈다. 복천사는 현재 법주사 복천암이다.

복천암을 중심으로 신미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신미대사가 세상을 떠나고 복천암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세워진 부도탑이 남아 있다. 1975년 충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에 보물 제 1416호로 지정됐다. 옆에는 신미대사의 제자인 학조대사의 부도탑(보물 1418호)도 세워졌다.

복천암 월성 큰스님은 “신미대사의 부도탑은 이 지역에 없는 돌로 지어진 탑이다. 성종 때 만들어졌는데 탑을 짓기 위해 국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신미대사는 국가에서 예를 갖출 정도로 당대의 고승이었다”고 말했다.

조정미 (사)동학혁명북적사업회 사무국장 /육성준 기자

역사기록에도 신미대사의 행적은 남아있다. 신미대사는 회암사에서 출가해 20대 후반부터 20여 년을 복천암에서 기거하다가 경기도 대자암, 합천 해인사, 경복궁 내불당 등을 거쳐 다시 복천암으로 돌아왔다. 이후 78세에 복천암에서 입적했다.

인근 속리산둘레길 2구간에는 신미대사가 서울 등으로 가기 위해 걸었다는 ‘신미길’도 조성돼 있다. 길을 만드는데 참여한 동학혁명북접사업회 조정미 사무국장은 “물길 따라 속리산면 상판리, 중판리, 하판리를 거쳐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보은과 신미대사의 연관성을 살려 ‘신미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복천암 월성스님 /육성준 기자

 

복천암과 신미대사

 

신미대사는 40대에 경기도 대자암으로 가기 전까지 복천암에서 두문불출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20여 년 동안 신미대사는 무얼 했을까? 역사서에는 최초 신미대사의 등장을 학승으로 기록한다. 또한 언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신미대사가 복천암에서 언어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복천암 도봉스님은 “복천암은 당시 왕실의 원찰이었다. 원찰은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신미대사는 왕조의 원찰에 근무한 왕사였고 스승인 함허대사의 특명을 수행하기 위해 언어를 연구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왕사는 임금의 스승이 되었던 승려를 의미한다.

신미대사는 기록된 마지막 왕사인 무학대사의 계보를 잇는다. 무학대사는 제자인 함허대사를 두었고, 신미대사는 함허대사의 제자로 출가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왕의 스승이라는 왕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왕사는 유교국가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불교는 국가통치자들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신문화를 이루는 중요 요소였다. 조선 초기에는 왕의 자녀인 대군들이 불교에 귀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조선의 통치계급은 국가의 사상을 유교로 세우면서 불교를 멀리했지만 이에 대비되는 기록들은 곳곳에 있다.

도봉스님은 “조선의 시작도 무학대사를 비롯한 불교의 도움이 컸다. 계보가 이어져 신미대사는 스승 함허대사의 유지를 받들었다. 함허대사는 ‘현정론’을 집필한 학자이다. ‘현정론’을 통해 차별 없는 것을 강조했다. 불교의 교리에도 그런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은 시작부터 백성을 양인과 천민으로 나누는 양천제를 따름으로써 평등사회가 아니었다. 당시 함허대사의 첫 번째 과제는 글자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한자는 하루 종일 농사에 매달리는 농민들이 배울 수 없는 문자였다. 도봉스님은 “신미대사는 함허대사부터 계속되어 온 ‘가림토어’를 체계화해 기호를 완성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고 추정했다. ‘가림토어’는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문자다. 현재 학계에서 ‘환단고기’는 위서로 판단해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신미대사를 알리기 위해 연극까지 제작한 복천암 도봉스님 /육성준 기자

 

역사기록과 ‘세조길’

 

그의 20년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복천암과 신미대사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실록에 기록된 단서들을 이어 개연성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초는 복천암과 연관된 자료들이다. 여말선초 시기, 복천암에는 특별한 무언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복천암을 방문했던 왕은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과 조선 7대 임금 세조다. 공민왕은 극락보전에 ‘무량수’라는 친필 편액을 남겼다. 당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왜 편액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1413년에는 세조가 복천암을 방문해 나라의 번창을 빌며 대법회를 열고 쌀 300석과 노비 30구, 전지 200결을 하사했다. 실록에는 방문했다가 신시(오후 3~5시)에 행궁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이는 3일 동안 이어졌다.

행궁은 장재리 말티재 초입에 위치한다. 현재 ‘장재리 대궐터’라는 지명으로, 행궁은 남아 있지 않다. 보은군에서는 세조가 복천암까지 올랐던 길을 세조길로 재현해 놓았다. 물길 따라 조성된 세조길은 법주사부터 세심정까지 2.4km 구간으로 곳곳에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세심정을 앞두고는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담갔다는 목욕소 등도 남아 있다.

어가가 당도한 복천암에는 세조의 어기를 꽂기 위해 마련한 ‘꽂이’도 남아 있다. 이후 실록에는 신미대사와 관련한 기록들이 이어진다. 세조 때는 선왕인 세종이 그를 혜각존자로 임명한 것에 대한 비판도 계속됐다.

이후 성종 4년에는 ‘병조에 전지하여 복천암에 내려간 신미대사와 학렬대사에게 말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신미대사는 당시 왕실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이후 신미대사는 성종 11년인 1480년 78세로 입적했고, 절 인근에 부도탑이 세워졌다.

복천암 신미대사, 학렬대사 부도탑 /육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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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maca 2019-08-09 16:18:39
한국은 역사적 기자조선(고려.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 인정)을 거쳐, 지금도 정사인 위만조선.한사군 이후 수천년 유교나라임.

한글창제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결과라는게 정설. 훈민정음은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라 함.

http://blog.daum.net/macmaca/2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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