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인공 ‘세종’이 아니라 ‘신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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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인공 ‘세종’이 아니라 ‘신미’였다
  • 박소영 기자
  • 승인 2019.08.0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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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논란 시끌
세종대왕의 초정 행차와 속리산 복천암 등장해 눈길

신미대사는 누구인가
영화 속 그 장면

영화 <나랏말싸미>는 도입부에서 ‘이 이야기는 한글 창제설 중 하나의 가설을 사용했다’는 자막을 띄운다. 그 가설은 바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이라는 설정이다. 이 때문에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역사왜곡논란부터 세종대왕 폄하 등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다. 신미대사는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인 ‘복천암’에 기거했던 고승이다. 세종은 그에게 ‘혜각존자’라는 칭호까지 내리면서 그의 업적을 높이 샀다. 보은군은 지난해 말 ‘신미대사’를 테마로 한 공원까지 만들었다. 신미대사와 얽힌 우리 지역의 이야기와 흔적을 따라가봤다.

 

영화<나랏말싸미>의 한장면

영화 <나랏말싸미>의 주인공은 사실상 ‘세종’이 아니라 ‘신미대사’다. 대중에겐 낯선 이름인 신미대사는 사실 불교계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다. 불경을 한글로 다수 언해(번역)해 보급했고, 세종뿐만 아니라 문종, 세조까지 세 명의 왕들과 인연을 맺으며 불교의 정신을 설파했던 고승이었다.

영화에선 세종과 신미대사가 만나 한글을 만들기 위해 고뇌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사실 한글 창제 과정은 비공개 프로젝트였다. 실록에는 한글이 언제부터 만들어졌고,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 참여한 이들이 누군지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만들었는지, 조력자가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알 길이 없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종대왕이 단독(서문에 ‘전하창제’기록)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 사이엔 한글 창제와 불교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불교계 인사들이 참여했다는 가능성을 주장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모티브로 삼고 있는 산스크리트어(梵字)-티베트어 기원설도 그 중의 하나다. 영화는 신미대사와 제자들이 한글을 만든 주역이라고 묘사했다. 이에 대해 영화가 상영되자 한글학회 등은 “근거없는 주장”이라며 비판했다.

 

한글창제 주역 논란

 

영화 속 역사논란을 제쳐두고 영화에서 충북이 등장했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눈병이 심했던 세종이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눈에 안대를 하고 초수(지금의 초정)로 행차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에는 한글 창제를 마치기 위해 마치 전략적으로 온 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신들이 여러 지방의 물을 떠서 왕에게 하사품으로 바쳤는데 초수의 물이 제일 좋아 내려온 것이었다. 한편 청주시는 이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오는 10월 초정행궁을 건립해 개관할 예정이다.

세종은 복천사(현재는 복천암)에 있는 신미대사를 만나 한글창제를 논의한다. 복천암, 초정의 모습이 나오지만 실제 우리지역에서 촬영하지는 않았다. 단, 훈민정음을 만드는 장면에서 보은의 각자장 박영덕 씨가 출연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초정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낸 변광섭 문화기획자는 “나랏말싸미에서 초정, 복천사, 신미대사의 이야기가 그려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지역사회는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에 고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공간과 역사만 있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콘텐츠가 있어야 사람들이 찾는다”라고 설명했다.

영화 제작사는 복천암의 스님들을 서울에서 열린 시사회에 초대했다. 복천암의 큰 스님인 월성스님은 영화를 보고 난 뒤 따로 영화평을 하지 않았다. 복천암의 도봉스님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모처럼 좋은 기회였는데 영화를 보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지도 못했고, 신미대사나 불교의 중요성도 담아내지 못했다. 한글학자와도 상의없이 만들어졌고, 마찬가지로 복천암에 있는 스님들에게 자문도 구하지 않았다. 영화가 다 만들어진 후 시사회를 통해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기존 연구들에 작가들의 상상력을 입혔다. 그런 면에서 영화 제작사가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곡성 태안사, 순천 송광사 국사전 등 사찰의 모습을 담아낸 것은 영화의 볼거리다. 또 조선 초기 복식이나 의례는 물론 음식과 의술에까지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다고 한다. 무엇보다 송강호(세종대왕), 박해일(신미대사), 전미선(소헌왕후)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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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는 어떤 인물인가

세종,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 존칭 내려

불교경전 한글로 번역, 한글 대중화의 숨은 공신

 

복천암에 있는 신미대사 초상화.

신미대사(信眉, 1405?~1480?)는 영동지방 양반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숭록대부를 지냈으며 외조부도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고위관료였다. 신미대사는 어릴 때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고, 10대 후반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해 관직을 맡고 있던 부친 김훈이 불충불효 죄목으로 경질된다. 경질된 이후 무예에도 뛰어났던 부친은 이종무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하는 공을 세우고 돌아왔지만, 오히려 죄인의 몸으로 출정했다고 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기까지 한다.

이 사건은 신미대사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그는 부친으로 인해 더 이상 관직에도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불심 깊은 집안에서 성장한 신미대사는 스무살 무렵 고향에서 가까운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일생의 도반인 수미(守眉)도 만났다. 신미대사는 함허당의 제자가 됐다. 신미대사는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능통했다.

신미대사는 ‘석보상절’의 편찬을 이끌었고, 23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등 고승법어집을 한글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대사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그만큼 한글 대중화의 숨은 공신으로 여겨진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신미대사 관련 내용들을 보면 문종이 즉위한 해 7월 세종은 유언을 통해 문종으로 하여금 신미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그만큼 세종에게 신미대사는 중요한 존재였다.

아직까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는 직접적인 명시는 없다. 영화 <나랏말싸미>의 조철현 감독은 에둘러 말한다. “세종의 애민정신과 새로운 문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애초 한글 창제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폰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총 책임자인 스티브 잡스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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