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녀가 도박중독자가 돼도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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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녀가 도박중독자가 돼도 좋습니까?”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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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정 현 (충북여성민우회 공동대표 )
   
화상경마장 얘기가 불거져 나오면서 난 문득, 희미한 기억 한켠에 묻어둔 유년시절의 할아버지 모습을 떠올린다. 6,70년대 어느 농촌마을의 주막풍경, 외지에서 온 노름꾼의 소란함과 함께 전개되는 매캐한 화투판 속에서 한 해농사를 마치고 모여든 동네사람들속에 끼어든 할아버지를 주막앞에 가 불러대곤 했던 일, 불러도 나오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그 무렵 결국 논 몇마지기를 날렸다.

당시의 시골살림에서 잃어버린 땅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한 휴유증이었다. 황소처럼 일만했던 증조할아버지의 불호령과 강인한 생활력만큼이나 기가 센 할머니의 분노,원망의 공조체계로 유약한 할아버지는 점점 더 소외되어갔다. 어린 내 눈엔 노름과 술을 가까이 한다함은 공동체내에서 철저히 비정상, 왕따가 되는 일이었다. 왕따는 본인의 소외만이 아니라 아내, 자식, 손자등 모두에게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황량함과 상처를 주는 일이다.

나의 그 짧은 기억의 단면도 이리 헛헛한데,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애틋한 감정이 빈곤했을 내 할머니와 아버지 형제들의 마음의 상처와 공허감은 어땠을까? 돌이켜보면 그 시절, 시골마을의 주막에 노름판만 없었으면 우리가족은 해마다 할아버지 기일을 훨씬 더 따뜻하고 다채로운 추억으로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세수확대를 위해서 경마장 사업신청을 허가하고 그 세수로 지역노인복지를 위해 돈을 쓰겠다는 자치단체장의 태도로 지역이 퍽 시끄럽다. 이미 시민단체들은 청원군의 경마장 세수가 23억이 아닌 기껏 1억정도에 불과하다는 논리적 반박을 하고 나섰다. 경마장 유치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 혜택은 전무하고 오히려 폐해만 가중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화상 경마장이 레저가 아닌 도박산업이라는 것은 이미 명확하다. 단순히 화면을 보고 베팅하며 많은 돈을 잃고 중독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무엇보다 이용객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드나든다고 응답했다. 도박중독에 걸릴 경우 대체로 의욕상실, 우울증, 인간관계 상실, 폭력을 야기하고 이혼, 자살시도까지 하게 되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지도자의 소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한 사업을 고민할 때 그 사업이 지역주민의 삶에 미치는 총체적인 영향에 대한 다각적이고 깊이있는 통찰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현장탐사와 객관적 실태자료도 제대로 수반되지 못한 채 갖는 지나친 확신은 맹목적 독선에 가깝다. 현재 우리의 농민과 지역주민의 삶은 단체장의 실험물 대상이 되기엔 너무나 엄연하고 비장하기 때문이다. 자치단체는 개인의 사유공간이 아니다.

가장 공공적여야 할 자치단체장의 소신은 엘리트의식에 기반한 개인적 판단이 아닌 민주적 절차속에서 다수의 의견을 모아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살이의 기본철학이라는 보편적 상식선을 견지하는 일이다.

설령 수백보 양보해 지자체 세수가 증대되고 다수의 주민이 원한다면 유치할 수 있는 사업인가? 나는 결단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지역에 설치된 도박산업으로 인해 한 아버지가 흔들리고 그로 인해 가족(특히 어린아이들)들에게 고통을 겪게 한다면 우리 모두는 누구도 그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화상 경마장을 반대함은 주객이 전도된 경제논리속에서 이성적 판단이 마비돼 허우적대는 천박한 물신주의의 늪에서 최소한의 건강한 인간다움을 지켜내고자 하는 몸짓이다. 시대정의나 교양, 품위까지는 거론하지 말자. 명절이나 생일날, 우리 모두는 조상의, 가족의, 이웃의 건전하고 상식적인 삶의 다양한 자세와 풍속에 대한 추억거리 정도는 충분히 나눌 수 있는 근거들을 유지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것은 자손과 미래세대에 대한 우리들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도박중독자나 경마장 이용자가 특수한 부류라고 생각하지 말라. 누구라도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인근 대전경마장에 가보길 권한다. 경기침체와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우울한 노동자 농민등 지역사회의 서민층들이 초점잃은 동공으로 허무한 한탕에 몰두하는 그 모습을, 경마장이 들어서면 예상가능한 내 가족, 이웃들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수를 운운하며 경마장 유치를 계속 들먹이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다시 말한다. “당신의 자녀가 도박중독자가 돼도 좋으시겠습니까?” 성매매산업이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범죄라면 도박산업유치는 자치단체가 주민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사악한 공적 범죄다. 또한 그것을 방조한다면 우리 모두는 같은 무지한 공범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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