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충북의 좌표는 ‘자존심과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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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충북의 좌표는 ‘자존심과 힘’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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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덕 현 (본지 편집인 )
   
충북에 있어 2004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은 타 시·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된 게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충북은 지난 1년 내내 투정의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연초가 되자마자 노무현정부의 충북 소외론이 고개를 들더니, 17대 총선 때는 충북이 열린우리당에 올인했는데도 총리와 국회의장은 커녕 장관 자리 하나 안기는데도 인색하다고 성토했다. 이런 볼멘 소리는 신행정수도 무산과 태권도공원 유치 실패에 편승해 계속 이어졌고, 이는 어느덧 도민들의 민심을 대변하는 확고한 잣대가 된 기분이다. 이런 피해의식에서 악령처럼 거듭 거듭 태어난 것이 바로 ‘충북은 들러리’라는 사생아적 피학증(被虐症)이다.

피학증은 누구한테 얻어 맞고 당해야 쾌감을 느끼는 성도착(마조키즘)이다. 이런 지저분한 비유를 갖다 대는 것에 왜 조심스럽지 않겠냐만 충북이 밟아 온 지난 1년의 궤적은 바로 이런 피학증 발현의 연속이었다. 일이 터지면 뒤늦게서야 충북이 또 당했다고 난리를 폈고, 국가 정책과 시책에서 밀리면 충북이 또 들러리를 섰다고 핏대를 올렸다. 그러면서 그 때마다 머리띠를 두르고 혈서를 쓰며 궐기 및 규탄대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힘있는 상대를 향해 일방적으로 삿대질을 해대는 이런 모습이 겉으로는 근사해 보이지만 끝나고 나면 공허했다. 바로 피학증의 증후군에 빠지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기만당하고 얻어맞을 때마다 표출했던 충북의 분개는 엄밀한 의미에서 피학증적 ‘쾌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도착적 희열은 지나고 나면 정서적 비굴함만을 남긴다. 지난 1년간 충북은 이런 병리현상의 노예가 됐다. 왜? 우리는 먼저 때리지 못할까. 왜? 우리는 먼저 나서서 설치지 못하고 항상 당한 후에야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가, 이런 비애감이 특별히 컸던 1년이었다.

그래서인가 2005년의 기대감이 더욱 벅차게 다가 온다. 국가경제가 극도로 어려워진다는 장기예보가 연일 언론을 장식하지만 새해를 맞는 기분은 역시 각별하다. 이런 생각에 나도 한가지 간절한 바람을 갖는다면 새해에는 제발 푸대접이니 들러리니 하는, 어쩌면 해방 이후 충북의 관념을 관통해 온 이런 구역질나는 퇴행의 단어들을 안 들었으면 한다. 체면보다는 자존심을 먼저 보살피고 자기합리화보다는 힘을 기르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런 화두를 떠 안게 될 2005년은 다음해인 2006년 6월 지방선거 때문에도 그 중요성이 크다. 지방선거에 앞서 우리는 2005년에 인물을 발굴하고 검증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충북이 강해지려면 리더를 잘 뽑아야 한다. 결정적일 때 뒤로 숨고 정작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는, 오로지 자기합리화와 교언영색에 강한 언행불일치의 리더는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다. 남들은 이미 10년전에 완수한 시·군통합을 놓고 여전히 뱁새 눈으로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다음번엔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또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지역사회의 세대교체다. 이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됐지만 충북의 움직임은 여전히 역동적이지 못하다. 무슨 일만 터졌다하면 항상 나서는 사람들이 과거 수십년간 끊임없이 보아 온 인사들이다보니 탄력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것이다. 이들이 여론을 앞세워 이른바 이너서클을 형성해 지역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그들의 역할은 정작 다른 데에 있다. 지역사회의 ‘원로’ 역할이다. 원로는 아무데나 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하고 결정적일 때만 나서야 인정받고 대접받는다. 충북에 원로가 없다는 말은 역으로 사이비 원로가 횡행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민선 지방자치가 시행된 90년대 이후에 특히 심해졌다.

그 책임이 나는 자치단체장들의 근시안적 안목에도 상당부분 있다고 본다. 당장의 안위를 위해선 맹목적인 지지자를 끼고 돌며, 그들에게 전방위의 역할을 기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역의 정체성을 갉아먹는 사회적 ‘암’과도 같다. 연줄에 얽매이는 당사자들의 막힌 사회인식도 문제이지만 이들이 견지하는 시각이 결코 보편적이고 포괄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치단체장에도 야전(野戰)의 전투의식이 절실하게 요구되며 이는 민선 지방자치시대의 필요충분 조건이 되고 있다. 노무현정권 초기 청와대에서 충북 소외론을 달래기 위해 충북 인물의 발탁에 나섰다가 포기한 사례는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누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그렇게 인물이 없냐는 자괴감에 앞서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됐냐고 지역사회의 그 잘난 ‘리더’들을 호통쳐야 할 것이다. 2005년 충북은 새로운 패러다임, 자존심과 힘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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