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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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이야기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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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예당 기획출판)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똥’은 써서는 안될, 지극히 혐오스우러면서도 결례를 범하게 되는 저급한 언어가 되어 버렸다. 해서 다들 똥이라는 우리말을 두고 ‘점잖은 격식’과 예를 갖춰, 한자어로 ‘인분(人糞)’이라고들 쓴다. 그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홍길동이 떠오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운운.” 그러면서 또 떠오른다. “똥을 똥이라 부르지 못하고 인분으로만 불러야 하는 통탄할 사회… 운운.” 그래서였을까? 이창동씨의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제목부터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논산훈련소의 소위 ‘인분사건’, 아니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 똥 먹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했었다. 하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똥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사회에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공장의 오폐수가 그러하고, 매캐한 매연이 그러하고, 그런 것을 남 몰래 방출하는 사람들의 심보가 그러하다.

입으로는 국민들만 바라본다면서, 속내론 무엇으로 제 이득 한 건을 챙길까 궁리하는 속 까만 정치인도 그러하고,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역사의 단추를 다시 꿰지 못하게 하려는 은밀한 의도가 그러하고, 민족의 정통성을 군부독재에서 연장시키려는 돼먹잖은 발상이 그러하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똥은 똥이다.’ 똥은 채소에게는 자양분이 되지만 사람에게는 씻을수 없는 모독이 된다.

군대라는 조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사시에 필요한 것이 군이라고 한정된 범위로 잡더라도, 그 조직은 엄정한 체계와 위계가 있어야 한다. 상명하복의 필요성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와 위계는 부하들에게 똥이나 퍼먹이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그것이 어느 조직이건간에 ‘인권’이라는 당위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조직을 이루고 있는 이상, 사람은 사람에게 사람으로서의 자격으로 대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인권이다. 사람에게 똥을 먹인다는 것은 인권의 말살이다.

‘당사자였던 모 대위가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저지르게 된것 같다’는 옹호 아닌 옹호는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  완벽주의자라는 말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를 말한다.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이미 완벽의 범주를 일탈한 것이다. 너무도 대비되는 말의 아이러니다. 그 말을 어느 정도 문맥상 자연스럽게 고치려 한다면, ‘완벽주의자’ 대신 ‘정신적 결벽증’이라는 말이 들어가야만 한다.

열린우리당의 박찬석 의원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한 행위가 아니었고 모 대위의 행동을 돌발적인 정신병자적 망동으로 치부해선 안된다”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돌발적인 정신병자적 망동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중급의 군 간부 행동이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에게 똥을 먹이는 행위가 박의원 말대로 ‘돌발적인 정신병자적 망동’이 아니라, 그의 발언을 뒤집어 읽어, ‘치밀하게 계획된 온전한 정신의 행동’이었다면 그건 더 심각한 문제다. 그런 일이 두번 세번 반복될수 있다는 이야기요, 그런 일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당위성을 제공할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이라는 미명하에 인권이 유린되고 희생 당한다면 그 조직은 이미 공공의 선을 일탈한 범죄집단이 되어버리고 만다. 군은 그 점을 특히 유념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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