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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를 메고 대궐로 간 우탁과 사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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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를 메고 대궐로 간 우탁과 사인암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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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 <2>

   
▲ 사인암 벽의 글씨들
고려말의 대유학자인 우탁(禹倬)은 원종 4년(1263)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에서 태어났다. 우탁은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탄생해서 3일간을 계속 울어대기만 했다. 집안과 마을 사람들은 아기가 잘못되었다고 수군거렸는데, 지나던 노승이 그를 보고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을 외우고 있구만. 큰 인물이요.”하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진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한 우탁은 충렬왕 4년(1278)에 향공진사가 되고, 충렬왕 16년(12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8품인 영해사록이 되었다. 우탁이 영해사록으로 부임하니 영해에는 팔령이라는 신사가 있어 그 영험을 믿는 백성들이 잦은 제사에 재물을 바치느라 폐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역동선생은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 신사를 철폐한 후 백성을 교화하여 폐해를 근절하였다.

   
▲ 김홍도의 사인암도
충선왕 1년(1308) 우탁이 47세로 감찰규정 재직 시절에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가까이 지내자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로 들어가 극간했다. 왕의 곁에 있던 신하가 격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펴들고도 왕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감히 읽지를 못하자 우탁이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경은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그릇된 점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지금에 이르니 경이 그 죄를 아느냐? ”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이에 신하들이 놀라 벌벌 떨고, 왕도 부끄러워 다시는 선왕의 후궁과 통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벼슬을 내놓고 물러난 우탁은 안동군 예안현 지삼리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했다.

충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리려고 했으나 끝끝내 사양하고,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롭게 유입되던 정주학을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 주었다. 특히 정이가 주석한 『역경』이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 없자, 우탁은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하여 후진에게 가르치니 비로소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역이 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서와 사기를 통달하였고, 더욱이 역학에 정통하여 점괘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고려사』열전에 전하고 있다. 우탁은 충해왕 3년(1324)에 세상을 떠났다. 우탁의 묘는 안동 정정리에 있고 적성면 하리와 대강면 사인암리에 유허비가 있고 애곡리에는 사당이 있다.

   
▲ 예나 지금이나 사인암은 한여름철 더위 보내기에는 제격이다.
단양에서 남쪽으로 6 ㎞ 지점인 상선암과 중선암 사이 가산초교 앞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단양팔경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승지 사인암에 이르게 된다. 해발 750m 덕절산 줄기에서 내려와 운계천에 접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암벽 사인암은 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다. 이 경승지는 우탁이 정4품 사인 벼슬에 있을 때 이 곳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성에 힘쓴 곳이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조선 성종 때 임재광이 단양군수로 재직하던중 역동선생이 사인벼슬을 지낼 때 이곳에서 청유(淸遊)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붙인 것이다. 사인암 밑을 흐르는 운계천의 옥같이 맑은 물과 첩첩이 쌓아 올려져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절벽과 어우러진 노송 등이 일품이다.

   
▲ 우탁의 탄로가가 새겨진 비석
사인암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는 역동 선생의 친필각자를 보기 위해 발길을 옮기니 물가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사찰에서 친 울타리와 자물쇠로 걸려진 쪽문이 시절의 각박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주지스님에게 열쇠를 청하러 간 사이 쪽문 옆에 서있는 역동 선생의 시를 조용하게 암송했다.

한 손에 막대 짚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말년의 역동 선생이 늙음을 한탄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탄로갯이다. 이 시조는 『청구영언』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책에는「춘산에 눈 녹인 바람」이라는 또 한 수의 시조가 있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 우탁 선생사적비와 태지비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에는 우탁선생의 사적비와 태지비가 있다. 사적비는 198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보조비를 받아 건립한 것이며, 태지비는 우탁선생이 태어난 곳을 기리기 위해 단양 우씨 후손들에 의해 1979년 건립된 것이다.
저근덧 빌어다가 머리 우에 불리고자,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사인암 바위벽에는 아직도 우탁의 글씨가 남아있다고 하여 수 백 척은 족히 넘을 듯한 기암절벽의 사인암의 암벽 밑으로 다가갔다. 마치 연마라도 한 것처럼 판판한 암벽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의 절경을 찾아왔던 유명·무명인들의 이름과 글귀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어 마치 낙서장처럼 어지러웠고, 역동 선생의 친필각자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사인암 위쪽 물 한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역동선생의 기적비로 올라갔다. 1977년 6월에 이 지방의 유림들이 건립한 「역동우선생기적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푸르른 아름드리 노송의 솔내가 진동하는 그 밑에서 풀어쓴 역동 선생의 친필각자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사인암에서 찾지 못한 선생의 친필은 아니었지만 선생의 뜻이 담긴 글을 대함에 아쉬움이 한층 덜어졌다.

탁이불군(卓爾弗群)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것이 아니며 확호불발(確乎不拔)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 서도 두려울 것이 없고돈세무민(遁世無憫) 세상에 은둔하여도 두려울 것이 없다유유자적하는 우탁의 모습이 글 안에 담겨져만 있는 것 같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사인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옛날 물가를 거니는 선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1. 우탁(禹倬) :
1263(원종4)-1342(충혜왕 복위3) 고려 후기의 대유학자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도 한다. 
 예안 역동서원(易東書院), 안동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2. 청련암 :
고려 공민왕(계축년 22년)에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된 고찰이다. 구한말 1876년 문경에서 봉기한 의병장 황토고리군과 접전 끝에 본사였던 대흥사가 소실되는 바람에 현위치로 이건하게 되었다. 대들보와 기둥은 당시의 것 그대로이다. 대웅전의 주불로 고려말에 조성된 대세지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3. 품달촌과 유학자들
우탁이 태어난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을 인근에서는 새원이라고 부른다. 금수산의 정기를 받은 적성 땅에는 ‘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세 곳 있는데 새원이·새터·새말 등이다. 이 세 곳이 이른바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품달촌'이다. 품달촌의 풍수는 정감록에서 말하는 구인종어우백이며, 십승지지라 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는 명현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곳이다. 이 품달촌 중 새원이에서는 우탁 선생이, 새터에서는 조선시대의 명필이며 대학자인 지수재 유척기 선생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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