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 지친 ‘실미도’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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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지친 ‘실미도’진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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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상 충북인뉴스 대표
‘실미도 684 부대원’ 매장 추정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16일자 <한겨레신문>보도에 따르면 71년 당시 경기도 벽제시립묘지에서 인부로 일했던 이동식씨(84)가 매장 지점을 증언했다는 것.

이씨는 “71년 여름께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관 20여개를 나를 포함해 40여명의 인부가 시립묘지에 묻었다. 나중에 묘지관리소장으로부터 ‘배 타고 인천으로 건너와 버스를 빼앗아 타고 서울로 쳐들어가다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같은 진술은 당시 시신처리를 지시한 공군본부 인사처 과장의 진술과도 일치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국방부의 유골발굴 조사와 DNA분석을 거치면 최종적으로 피해자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의문의 죽음’으로 역사속에 파묻혔던 청년 24명의 원혼이 마침내 구천에서나마 위안을 받게 됐다. 특히 24명의 희생자 가운데 옥천 출신 청년이 7명이나 포함돼 있어 지역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충청리뷰>가 지난 99년 청주 출신 훈련교관 김방일씨의 증언을 토대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를 지역에서 첫 확인보도했다. 이후 영화 ‘실미도’의 빅히트를 통해 ‘잊혀진 과거사’는 ‘살아있는 현대사’로 빛을 발했다. 68년 당시 실종된 가족이 실미도 특수부대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하지만 국방부는 실미도 관련 서류의 폐기를 이유로 특수부대원 명단과 시신 매장지 확인작업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공설묘지 인부의 매장 추정지 제보도 방송사를 통해 유가족에게 전해지면서 밝혀진 것이다. 실미도 유가족 11명은 지금도 국방부 앞에서 매장 추정지에 대한 조속한 발굴을 촉구하는 밤샘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희생자 가운데 임성빈씨(당시 26세)는 자폭현장에서 살아남아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72년 3월 형집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임씨의 동생 2명은 현재 청주에 살고 있고 임홍빈씨(39)는 유가족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임씨 가족들은 7개월간 군사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국방부가 가족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심지어 68년 차출된 이듬해인 69년 면사무소 직원이 이미 가족들에게 사망통보한 것으로 밝혀져 군당국의 기록말소작업이 자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남북 대치상황의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을 백분 인정하더라도 국가 공권력의 잔혹함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실미도 희생자의 보상문제에 대해 ‘무장난동으로 민간인까지 희생됐다’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심신이 멀쩡한 청년 20여명을 반경 2km의 섬에 가두고 3년을 지내도록 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실미도 영화내용처럼 상부에서는 ‘제거론’까지 나오는 마당에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특히 무장탈출 대원들은 추격하는 경찰과 차량대치했던 군인들에게 사격을 가했을 뿐 민간인들을 겨냥했다는 주장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자폭한 버스에 살아남은 민간인 생존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특수부대원들이 “우리는 공비가 아니다. 팔자 고치게 해 준다더니 4년 동안 섬에서 죽도록 훈련만 시키고 돈은 커녕 제대로 먹을 것도 안줘 (기간병) 다 죽이고 나왔다. 당신들을 해치려는 게 아니고 높은 놈들이 우리 목표”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셈이다.

겁에 질린 승객들이 포도·복숭아·옥수수 등 먹을 것을 주자, 이들은 배가 고픈지 포도 한송이는 한 입에, 옥수수는 두 입에 먹어치웠다는 것. 또다른 생존자는 “당시 살아남은 승객들을 만나 희생자들의 위령제라도 지내주고 싶다”며 착잡한 심경을 나타내기도 했다. 실미도의 비극은 영화, 소설을 통해 일부의 사람들에게 큰 돈벌이가 됐다. 하지만 24명의 시신은 아직도 땅에 묻혀있고 그 가족들은 거리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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