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전 천장이 화려한 월악산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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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천장이 화려한 월악산 신륵사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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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권<2> - 제천시<1>
   
신륵사(神勒寺)는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속리산 법주사 말사로,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803-5번지 월악산 동쪽 기슭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월악산에는 영봉을 중심으로 삼각점을 이루며 덕주사와 보덕암 그리고 신륵사 등 세 절집이 있는데, 이 중 신륵사는 동쪽 지점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신륵사와 덕주사는 신라시대의 고찰이며, 보덕암은 옛 절터 위에 근래에 새로 지은 절이다.

창건 및 연혁에 의하면, 신륵사는 제천 지방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찰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582년(진평왕 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대덕사라고 하였고, 다시 신라 30대 문무왕 때에 원효대사가 중창하였다. 그 뒤 고려말 공민왕 때 무학대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광해군 때 사명대사가 각각 중창,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월악리 쪽에서 바라본 월악산
이 절의 명칭이 신륵사라고 불리게 된 것은 확실치 않다. 다만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부터라고도 하며, 또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라고도 한다. 당시 이 절에는 수경대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득도를 하고 절에 내려와 있던 고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데 이 때 절 아래 월악일대에 괴질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에 걸려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이는 스님을 시기한 귀신의 짓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스님이 수경대에 오르더니 병풍바위에 숨어있던 귀신을 잡아 코를 꿰어 항복을 받으니 괴질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때부터 신륵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중창 이전의 신륵사.지금은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당간지주가 탑앞에 서있다.
월악나루를 지나 5분여, 오른편으로 둥그런 연자방아에 쓰여진 ‘수산 2리’라는 이정표와 함께 용하구곡, 월악민속놀이학교, 신륵사 6.5㎞라고 쓰여진 푯말이 나타났다. 성천교를 건너며 부터 시작된 눈부신 오색 단풍들이 신륵사로 들어가는 양편 계곡으로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오매 단풍 들겄네” 장광에 골불은 감닢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 보며 “오매 단풍 들겄네”층층이 타오르고 있는 신륵사 앞 단풍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김영랑의 시 「오매 단풍 들겄네」가 떠올랐다.

   
▲ 신륵사 극락전
정말이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륵사 극락전에서 바라보는 단풍은 아침 햇살에 오색의 빛을 반짝이며 사람들의 가슴을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월악산 신륵사에는 극락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국사당, 요사채, 삼층석탑(보물 제1296호), 당간지주, 산신각 등이 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을 일컫는 말이다. 극락이란 ‘즐거움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안양(安養)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의 불토를 지난 곳에 모든 것이 완전히 갖추어진 이상향인 극락정토가 있는데, 고해의 바다에서 번뇌하는 중생이 부처의 가르침을 쫓아 열심히 염불하며 정진하면 죽어서 이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정토는 일반 중생들에게 사후의 행복한 생활을 제시함으로써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세계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절집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법당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 삼존불
아미타불이 성불하기 전에는 한 나라 임금의 지위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보살이었지만, 석가모니여래불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그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 겁으로도 셀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극락전을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한편 법당에 모신 주존불의 이름에 따라 ‘미타전’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에는 당연히 주인이 되는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좌우에는 고해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삼존불 뒤쪽으로는 극락의 법회장면인 극락회상도나 극락구품탱화 등이 걸려있다. 월악산 신륵사 극락전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 극락전 앞뜰의 당간 지주
극락전은 조선 후기 목조건물이며 정면 3칸(11m), 측면 3칸(8m), 높이 9m, 면적 21평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고색이 넘치는 건물이다. 맞배지붕이면서도 공포를 다포로 처리한 것이 특징인데, 1960년 일부를 중수했으며 기둥은 느티나무를 썼다고 한다.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면 불단 위에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자대비를 긍극적인 수행목표로 삼고있는 관세음보살좌상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지혜의 문을 맡고 있으며 삼도 중생을 제도하는 무상한 힘이 있다는 대세지보살좌상이 협시한 삼존불이 있으며, 내부에는 신장도 2점, 대자재제석도, 십육존좌도, 범왕제석도, 나한도 4점의 탱화가 걸려 있다.

   
▲ 극락전 외벽의 불화
아미타삼존불상 중 본존불인 아미타불좌상은 목조로서 높이 140㎝, 어깨너비 51㎝, 머리는 소라껍데기 모양의 나발 형태이며, 육계(肉琦)가 낮고 두 눈썹사이에 백호가 있으며, 상호는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되어 너그럽게 보인다. 귀는 길고 큰 편이며 목에 삼도가 있다. 수인은 무릎 가까이 수평으로 손바닥을 위로해서 들고 있으며 결가부좌한 두 무릎을 불의가 덮고 있다.

   
▲ 극락전 내부의 불화들 2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나 보살의 손이나 손가락의 특정한 모습을 인상(印相)이라고 한다. 인(印)은 세존의 내증, 서원, 공덕의 표지이므로 불변하는 것이며 손가락을 꼬부리기도 하고 여러가지 물건을 잡기도 한다. 손가락을 꼬부리는 것을 수인(手印)이라 하고 물건으로 인을 표시하는 것을 계인(契印)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좌상은 전체높이 114㎝, 어깨넓이 43㎝이며, 인자하면서도 힘있어 보이는 대세지보살좌상은 높이 110㎝, 어깨넓이 40㎝이다. 조성연대는 관음상이 1960년이며, 세지보살상은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삼존불 뒤로는 아미타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1987년에 조성한 지장탱화, 칠성탱화,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 후불탱화
후불탱화의 크기는 가로 280㎝, 세로 300㎝로 화기 아래 부분이 잘려져 있고, 탱화 좌우의 산중질과 연화질도 반쯤 잘려진 상태라서 정확한 연대측정은 어렵다. 다만 왼편 화기 연화질 부분에 ‘가경십○년(嘉慶十○年)…’ 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 그림이 1806년에서 1814년 사이에 조성된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그림을 그린 금어스님은 확인할 수가 없다. 또한 신륵사 극락전 천장을 쳐다보면 우리 나라 어느 절집과 비교해도 화려함이 뒤지지 않는 장엄한 그림과 조각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 극락전천장의 그림들
천장 가운데에는 용을 비롯한 여러 모양을 조각하였고, 좌우 벽면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각각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고색창연한 그림을 비롯해서 천동, 천녀 주악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주악상을 중심으로 잉어인 듯한 30여 마리의 물고기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색다르다. 천장 가운데의 네 귀에는 네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기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천장을 화려하고 현란하게 장식하는 이유는 법당은 부처님이 사부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여래불이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법화경을 설법할 때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던 꽃의 환상과 신비를 법당 안에 재현하기 위함이다.

극락전 왼쪽 바깥 처마 아래에는 1960년에 쓴 「월악산신륵사중수기」가 걸려 있다. 극락전 바깥벽은 다양한 벽화가 있다. 건물 외벽 오른쪽 상단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는 장면인 「선유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비롯해서 아미타도, 관음도, 달마대사도, 반야용선도 등이 그려져 있다. 한편 외벽 풍판 안쪽의 천판에는 커다란 물고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내용은 큰 물고기가 중간물고기를, 중간물고기가 작은물고기를 잡아 먹는 모습인데, 이 그림은 석가모니의 전생설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극락전 합각 천판의 물고기 그림 . 위 석가모니의 전생설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1
석가모니 부처가 전생에 보살행를 닦을 때 바닷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를 보았더니,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또 작은 물고기는 그보다 더 작은 물고기를 서로 잡아 먹고 있었다. 이 때 석가모니가 큰 물고기를 잡아 포식하니 작은 물고기는 새 세상을 얻게 되었다. 이 물고기가 후에 경어(鯨魚)의 왕이 되었는데, 그 키가 수 리나 되었다. 그때 마침 해변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으니, 경어가 몸을 해변에 대고 그들이 먹게 하여 기근이 든 인민을 구하였다고 한다.

극락전 앞 뜰에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그리고 국사당이 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달아 세우는 깃대를 고정시키는 받침대를 말한다. 크기는 두 지주의 높이가 각각 높이110㎝, 넓이는 동쪽 것이 40㎝, 서쪽의 것이 43㎝로 차이가 있다. 두 지주는 아래위로 60㎝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홈이 있는데 그 가운데 동쪽 것은 홈이 좌우로 맞뚫려 있다. 신륵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1296호로 지정되었으며 극락전 정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이다.

   
▲ 복원공사 중 발견된 소형토탑
불국사 석가탑을 옮겨놓은 것처럼 정교하고 간결하며 장중한 아름다움과 비례가 잘 맞는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높이가 4m이며, 1.46m의 정방형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찰주 등이 완전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같은 예는 다른 탑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방향이 극락전 정면과 약간 어긋나 있어 조화스럽지 못한 점으로 보아 극락전과 다른 시기에 조성되었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이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1년 4월 해체 복원하던 중 석탑의 기단부에서 소형 토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사리함은 금동편과 동편으로 그 양식은 서로 다르다. 소형 토탑은 높이 3.5∼5㎝의 방형다층탑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흙을 빗고 선을 그어서 탑층을 표현한 것이다.

   
▲ 산신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국사당은 원래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의 수경대에 있었다고 한다. 국사당은 다른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전각인데 이곳에 국사당이 모셔진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때부터 월악신사(月岳神祠)를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1256년(고려, 고종43년)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나 1592년(조선, 선조25년) 임진왜란 등 큰 전란이 있을 때마다 이 부근 사람들은 월악신사에 모여 난을 피했다고 한다. 이런 큰 난리 때마다 모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월악산 신사의 무량한 영험 때문이라고 믿던 이곳 사람들은 늘 신사에 제사 지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월악산신사가 국가적 기도처에서 후에 마을의 수호신격으로 성격이 달라졌는데,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월악산 신사는 방치되어 폐허화되었다. 그 뒤 주위 마을은 흉년이 들고 대홍수가 났으나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신륵사에는 주술에 능한 한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이처럼 흉년이 드는 것은 사람들이 월악산 산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저버렸기 때문이라 하여 절 경내에 국사당을 지어 월악산에 상주하는 신령님을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 국사당 전경.
현재 국사당은 월악산 삼봉쪽을 바보며 절을 지키고 있는데, 맞배지붕에 사방 한칸의 규모로서 안에는 작은 보살상과 중앙의 신령, 좌우에 어린 남자와 여자가 신령을 모시고 있는 탱화 한폭이 봉안되어 있다. 또 절에서 약 2㎞ 가량 떨어진 지점에 1984년 무렵까지만 해도 부도 2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1기만 남아 있으며, 삼층석탑, 극락전, 괘불대 등 역사가 오래된 문화재와 사지가 넓으면서도 아늑하여 과거 수도장으로 신륵사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세가 몹시 기울었는데 근래에 들어 국사당, 산신각을 새로 지으면서 예전의 면모를 되찾아 가고 있다.

현재 국사당에는 ‘局師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국가에서 내리던 최고의 승계인 국사(國師)의 의미와 절을 수호해 주는 신에게 제사를 제내는 국사단(局司壇)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는데 국사당이 전해오는 내력과 내부에 봉안된 탱화로 보건대 국사단(局司壇)으로서의 의미가 더 맞지 않나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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